자기만의 방과 쉼
어느 날,
결혼한 지인이 말했다.
그 말은
집이 없다는 뜻도,
혼자 살고 싶다는 뜻도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가족도 있었고,
역할도 충분히 맡고 있었고,
하루가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꽉 찬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자기만의 방’을 말할 때
그녀의 얼굴에는
오래 참아온 숨 같은 것이 얹혀 있었다.
그 방은
도망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너무 오래 겹쳐 살아온 삶 속에서
자기 윤곽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더 가까워 보였다.
사람은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고,
닮아간다 해도
완전히 겹쳐질 수는 없다.
하지만 여자의 삶은
유난히 오래
겹쳐지는 쪽을 미덕으로 배워왔다.
관계를 위해 조금씩 줄어들고,
가정을 위해 자신을 미루고,
모두가 괜찮아질 때까지
자기 차례를 뒤로 미뤘다.
그렇게 조율하고, 받치고, 버텨온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 덕분에 자랐고,
누군가는 무너지지 않았고,
어떤 하루는 무사히 지나갔다.
하지만 그 시간은 동시에
자기 자신과의 거리를
조금씩 벌려 놓았다.
여자들의 외로움은
사람이 없어서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 속에 오래 있을수록
더 또렷해진다.
모두와 함께 있는데도
어느 순간
‘한 사람’으로는 불리지 않는 느낌.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직원으로는 존재하지만
그 모든 이름을 벗은 나는
호명되지 않는 순간들.
그래서 이 외로움은
결핍이라기보다
정체성의 신호에 가깝다.
오랫동안
관계를 서포터의 자리로만 지속해온 사람일수록
고독을 두려워한다.
혼자가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빈둥지 증후군 역시
그 연장선에 있는 감정일지 모른다.
하지만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외로움이
사람을 향한 결핍이라면,
고독은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다.
그녀가 말한 ‘자기만의 방’은
바로 그 거리였다.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한 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방.
여자를 종종
땅에 비유한다.
동양의 오래된 언어 속에서도
남성은 하늘과 양을,
여성은 땅과 음을 상징해왔다.
그래서인지
흙은 언제나
무언가를 키우기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고 낮춘다.
씨앗을 품고,
물을 머금고,
수없이 밟히면서도
끝내 생명이 자랄 자리를 만든다.
여자의 삶도
오랫동안 그런 흙의 시간에 가까웠다.
받쳐주고,
조율하고,
조용히 견디는 일.
하지만 흙도
언제나 밟히기만 하면
숨을 쉴 수 없다.
너무 많은 발자국이 찍히면
단단해지기보다
굳어버린다.
그래서 흙에는
쉼이 필요하다.
바람이 통하고,
햇빛이 닿는 시간.
자기만의 방을 꿈꾼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흙으로만 살 수 없다는 자각이다.
서포터로만 존재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아주 최소한의 요청.
이 글은
그 방을 이미 가졌다는 이야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아마도 많은 여성들은
그 바람을 여전히
마음속에만 품고 살아갈 것이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해도
자기만의 공간을
당당히 요구하기엔
여전히 조심스러운 현실 속에서.
다만 나는
흙으로 살아온 삶이
이제는 다른 배움을 요구하고 있다는 지점에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한 해, 한 해를 버티다 보면
나이 든다는 것은
무언가를 잃는 일이 아니라
다시 배우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