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정직하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춤을 췄다.
어린 시절, 나의 하루는 몸으로 시작해 몸으로 끝났다.
늘 움직이고, 늘 땀을 흘리고, 늘 근육통과 함께 살았다.
솔직히 말하면, 근육통이 없는 아침은 한 번도 없었다.
근육통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의 신호 같았다.
몸은 언제나 유연했다.
아프면서도 금방 풀렸고,
연습만 시작하면 금세 반응했고,
그 어떤 동작도 시도할 수 있을 만큼 몸은 젊고 빠른 언어를 썼다.
그러다 허리부상 때부터 무용을 완전히 놓게 되었다.
매일같이 하던 훈련이 사라졌고, 요가 같은 스트레칭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몸은 처음으로 ‘완전히 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이상한 변화가 시작됐다.
어느 아침, 눈을 떴는데 '정말 내 몸이 밤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구나'라는 기분이 들었다.
등과 허리는 굳은 나무토막처럼 같고,
손끝, 발끝이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처럼, 감각조차 흐릿했다.
몸이 말하던 ‘빠르고 명확한 언어’가 사라지고,
낯설고 느린 언어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마다 스트레칭을 해도
쉽게 풀리지 않고,
예전처럼 단순한 스트레칭 동작도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건,
척추를 하나하나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온몸이 하나의 악기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였는데,
이제는 척추 마디마디가 따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 내 척추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구나."
그제야 알았다.
몸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몸의 언어가 섬세해지고 느려지고 구체화되는 것이라는 걸.
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젊었을 때는 작은 일에도 마음이 휙휙 움직였다.
조금만 섭섭한 말을 들어도,
조금만 실패를 겪어도,
속으로 파도처럼 요동치는 감정이 하루를 삼켜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감정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신,
내 안에 ‘굳은 신념’과 ‘편견’이라는 것이 조금씩 자리 잡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젊을 때는 유연한 만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살았다면,
지금은 익숙한 것, 안전한 것, 내가 아는 것만 고집하게 될 때가 있다.
그 고집이 마음의 경직을 만든다.
몸이 굳는 것과 마음이 굳는 것은 참 닮아 있다.
그래서 요즘은 '몸을 풀어주는 연습이, 마음을 풀어주는 연습과도 같다.'라고 생각하고 나는 필라테스를 매일 새삼스럽게 느낀다.
한 동작을 할 때마다
"내 몸이 오늘은 어디까지 허락하는지",
"어디가 굳어 있고, 어디가 열려 있는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렇게 몸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음속 고정관념도 조금씩 풀린다.
"꼭 이렇게 해야 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그런 생각이 조금씩 느슨해진다.
몸이 유연해지면 마음도 유연해진다.
몸이 느려지면 마음도 서두르지 않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몸의 언어가 바뀌는 것이다.
빠른 언어에서 느린 언어로,
지시하는 언어에서 대화하는 언어로.
그리고 마음의 언어도 바뀐다.
요란하고 즉흥적인 언어에서
조용하고 깊은 언어로.
그래서 요즘 나는 아침에 굳어 있는 내 몸이 신기하다.
그것을 억지로 풀려고 하지 않고,
하루하루 내 몸과 대화를 시도한다.
필라테스 매트 위에서
"오늘은 어디까지 괜찮니?" 하고 물어본다.
그렇게 몸과 친해지고,
그러다 보면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몸은 정직하다.
마음보다 더 정직하다.
몸의 변화에 귀를 기울일수록
나는 더 나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것이 나이 듦의 가장 큰 선물 아닐까.
[오늘도 당신의 몸은 어떤 언어로 말하고 있나요?
한 번 천천히 들어보세요.
몸을 풀어내는 언어가 당신 삶을 더 부드럽고 깊게 만들어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