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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이쓰 Oct 13. 2015

쎄라비

C'est La Vie. 그게 바로 인생이야.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밤을 완전히 새웠다. 아침 일곱 시 반쯤 눈 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술기운이 기분 좋게 몸을 감돌 때면 쉴 새 없이 웃음이 나오는데 잠에 취할 때도 그렇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이 재밌어서 깔깔대고 웃다가 오전 동안만 잠을 자 두기로 하고 열한시 반에 알람을 맞췄다.


기절하듯 뻗어 눈을 감자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옛일들이 떠올랐다. 수년 간 기억하지 않았던, 이제는 다 잊었다고 생각한 일들이었다. 밤이 새도록 누군가와 이야기했다. 그의 비밀을 들은 만큼 나의 비밀을 얘기하다 보니 봇물 터지듯 터져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린 일들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 A의 이름과 B의 이름과 나의 첫 키스. 기억해내려 애를 써도 삼  년째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기억의 파편들. 이렇게 잠들다간 꿈에서도 고민에 빠질 것 같아 눈을 번쩍 떴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숙면을 취한 듯 개운한 아침을 맞이했다. 그의 깊은 속내를 담담하게 받아들인 나는 왜 아직도 나의 깊은 속내를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떠버린 건지 가슴이 갑갑해져 왔지만 창문 밖으로 번져 드는 햇살의 기운을 받으며 오늘을 살기로 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그게 바로 인생이야.


C'est La Vie.


절대로 잊지 않고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해두려 했던 그를 이젠 이름 석 자도 기억할 수 없는 것.

시간이 약이라고들 하지만 이렇게나 잘 드는 약이 될 줄이야.

죽을 때까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던 사람도, 도무지 답이 없어 막막하기만 한 했던 일도 배를 타고 흘러 흘러 모두 나를 떠나간 것.

시간이 쏜살같다고들 하지만 이렇게나 빠르고 정확한 화살일 줄이야.

이렇게 될 줄 진작 알았더라면 그리 전전긍긍하지 않았지. 하지만 그래서 인생.


C'est La Vie.


처음으로 혼자 기차를 타고 대구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대구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음악다방 '쎄라비'였다. 드라마 <사랑비> 촬영 장소로 유명하다는 것을 도착해서 알았다. 고백하건대 그런 드라마가 방영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문 연 지 10분, 손님은 나 하나. 오래된 다방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좋아서 사진을 찍고 다방이모에게 날 찍어달라고 하자 그녀는 장근석이 앉았던 자리에 앉길 권유했고 난 괜찮다며 다른 자리에 앉았다.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받아들인 그녀는 여섯 장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어색한 한국말과 다정한 눈빛을 건네며 나의 낯선 모습을 담아 주고 쌉싸름한 아메리카노를 주던 그녀를 만난 곳.


어색하고 낯설지만 다정하고 쌉싸름한

C'est La Vie.

그래, 뭐. 그런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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