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 조각 하나.
금요일이었다. 퇴근 두시간 전에 바다를 보려고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낯선 길을 걷고 싶어서 늘 내리던 정류장을 지나 아무데서나 내렸다. 바다로 향하되 바다에 닿기 전 보이는 골목마다 어슬렁거렸다. 차 한대가 지나가려면 사람은 벽에 붙어 멈춰서야 하는 좁은 골목이었다. 분명 처음 걷는 곳인데 익숙한 느낌에 이끌려 세갈래 길 중 한쪽을 택했다.
2년 전 제주에 온 지 한달이 채 안되었을 때 나는, 동네 카페 사장에게 반했다. 틈만 나면 카페로 갔다. 일을 일찍 마쳐서, 비가 와서, 놀러갔다 오는 길에 굳이 핑계를 만들어 가서는 결국 친해졌다. 단순히 카페 사장인 줄 알았는데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제주살이 한달차, 신나서 돌아다녔지만 차 없는 길치, 방향치여서 지금보다 더 심하게 길을 헤매고 다닐 때였다. 반면 그는 한번 가 본 길을 잊지 않고 내비게이션 없이 제주도 온 동네 구석구석을 찾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었다. 비가 많이 오던 어느날 하루종일 차를 타고 제주도를 한바퀴 돌았다.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 인상깊었던 골목이 몇군데 있었는데 그중 도통 어디쯤인지 기억나지 않던 곳을 만났다. 작은 무인갤러리가 있고 좁디좁은 골목을 지나면 바다였던. 갤러리의 이름을 알았으니 찾아보면 될 일이었지만 애써 찾지 않았다. 또 가게 될 곳이면 언젠가 만나겠지 했는데 이렇게 만났다. 전주 출신 미식가인 그는 알짜배기 맛집도 많이 알고 있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며 여기 음식은 꼭 먹어봐야 한다고 했던 곳도 그 근처였다. 길이 닮아 줄곧 오일장 어디쯤으로 착각하고 있었는데. 머릿속에 흐트러져있던 퍼즐이 맞춰진 듯 개운했다.
이틀 뒤 일요일에 다른 바다를 보러갔다. 역시 모르는 정류장에 내려 바다로 향하는 골목을 한참 걸었다. 사람 없는 항구에서 놀다가 사람 많은 해변으로 가자 여기저기서 웨딩 스냅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찾는 그를 보았다. 사실 그가 어디서 일하는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라도 코앞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지만 제주 동쪽 어느 바닷가가 될 줄은 몰랐다.
한때 운명이라고 여겼고 모든 행동이 멋졌던 사람, 어쩌면 그를 기점으로 나는 좀 달라졌다. 함께 있으면 떨리고 그사람이 너무 좋아서 주변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말고, 함께 있으면 편해서 나를 다른사람인양 꾸미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는 것. 친구든 연인이든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물드는 관계를 지향하게 되었다. 빨리 끓은 냄비는 빨리 식는 법이니까. 그걸 서른에야 알았지만 그때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그만큼 용기내어 다가가는 법을 잊은 건 애석하지만.) 아무 감정이 없었다. 바다를 보러 왔으니 바다만 보았다. 조금 이상한 주말이라 여겼지만 한편으론 좋은 추억으로 남아준 그가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