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길은 비록 선명하지 않지만.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대로 재입학하는 학생들의 수가 해마다 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재입학하는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학과는 간호학과와 유아교육과, 물리치료학과 등이었다. 비교적 졸업 후 안정적으로 취업이 가능한 학과들이다. 한 여대생의 인터뷰가 나왔다. 왜 간호학과를 선택했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냥 적성에 맞는 것 같고 보람 있는 일이겠다 싶어서...'라는 뉘앙스의 대답을 했다. '4년제 대학교에서 다른 전공을 공부했지만 이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조금 늦어도 꼭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가 아니다. '취직이 안되어 전문대에 갔더니 제일 취직이 잘 되는 과가 간호학과란다. 성적도 되고 공부해보니 그럭저럭 적성에 맞는 것 같다'였다. 아버지와 함께 그 뉴스를 보면서 세상이 어쩌자고 이렇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지만 그것은 비단 남의 일이 아니라 곧 나의 일이기도 해서 마음이 착잡했다.
나는 지난번 글에서 언급한 바 있듯 문학을 좋아하고 가장 하고 싶어 했으면서 나 자신을 속이고 경영학도가 되었다. 나 뿐만이 아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제대로 준비하고 계획해서 원하는 학과에 간 친구들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생뚱맞은 학과를 지원했다.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거고, 그래서 그걸로 뭘 어떻게 먹고살겠나 하는 십대 학생들의 불안함을 들어주고 같이 고민하며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부모님과 선생님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해진 길, 이거다 하는 무엇이 보이지 않는 이상 선택권은 제한적이었다. 그만큼 나의 꿈을 고집할 자신도 없었고.
그렇게 대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만큼 하고 회사생활을 했다. 회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도대체 난 4년 동안 뭘 배웠나 하는 것이었다. 당장 팩스 하나 보낼 줄 몰라 쩔쩔 매고 사장님의 농담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글로 배운 수많은 지식은 그야말로 '지식' 그 자체였다. 그나마 중고등학교 때 워드프로세서와 컴퓨터 활용 자격증을 따며 배운 걸로 문서작업을 했고 평소에 읽었던 책으로 더 많은 임기응변을 했다.
어느 날 삶이 권태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회사에 하루 종일 앉아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양심적이지 않은 일들을 회사의 이름으로 하면서도 결국 그 일을 직접 하는 나는 너무 괴로웠다. 십년 뒤와 이십년 뒤를 생각하면 머릿속이 새까매졌다. 건강도 많이 안 좋아지고 여러 가지 상황을 겪다가 회사를 그만두었다. 처음 몇 달은 멍하니 쉬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외면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현재 나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대신 나의 가장 소중한 가족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우선은 내년 이맘때까지 자격증을 따고 취직을 하기 위한 준비과정을 밟고 있다고 모두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막연히 글을 쓰고 싶다는 것 외에 이렇다 할 무언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확실한 답을 기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비겁한 변명이라고 치부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 무언가를 찾는다고 해서 확실히 잘 해낼 것이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그것을 찾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혼자 고민해보고 싶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금 이 나이에 이러고 있어도 되나, 더 늦기 전에 그만할까 하며 밤잠을 설치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은 채 좋아하는 일을 마냥 해보고 싶었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며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약 1년이라는 이 시간이 아무 결과 없이 더 높은 벼랑 끝으로 날 몰아 댄다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최소한 미련은 없을 테지. 아직은 견딜 만한 것이다.
학생들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지 않는 교육체제와, 삶의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는데 비해 단일화된 이 사회를 비판할 마음은 없다. 결국 인생을 주도하는 것은 나 자신이니까. 어릴 때 제대로 알지 못해서 엉뚱한 전공을 지원했든, 대학을 나와서 또다시 취업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든, 시행착오를 겪어 약간 먼 길을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는 조금 다르게 정해진 길이 아닌 전혀 보이지 않지만 가고자 하는 길을 찾아 조심스레 걷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기 위해 외부의 시선을 적당히 견뎌내며 나의 사회적 위치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모두가 안정적인 간호사, 교사, 물리치료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차피 인생에 정답은 없으니 말이다. 다만 나를 비롯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쓰는 모든 청춘들을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