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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이쓰 Dec 25. 2016

바람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엇갈린 바람들이 비가 되어 흩뿌리는 밤이다.

내가 바란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네가 바란 너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정작 제대로 대답할 자신이 없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나의 결정과 행동에 따른 책임이 그저 나에게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고단한 인생을 굳이 오래 겪고 싶지 않다는 것과 혼자가 좋아서 혼자이기보다 혼자가 편해서 혼자라는 것.

꼭 모든 것이 확실해야 하나. 그러지 못해서 내 걸음이 이렇게 휘청거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역시 난 모르겠다.


나는 그녀를 친구로 여기고 좋아하면서 한편으로는 함께하는 것이 버거워 몇 번이나 피했다. 그토록 불편했던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나에게 끝없이 끝없이 질문했다. 질문들은 오래 묵은 나를 꺼내보게 했고 아직 정제되지 않은 생각과 감정을 내보이게 했다. 상대방에게 나를 드러내는 일이 여전히 두려운 것이다. 날 얼마나 한심하게 여길까, 나에게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결국 스스로를 차갑게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느꼈다.


작년 이맘때는 달랐다. 혼자 필름 카메라를 들고 나선 여행길에서 나 자신을 마주하고 다독였다. 미워하지 않기로, 용서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었다. 나를 사랑하고, 가장 미워했던 이마저 용서한 일련의 과정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그때 그 길 위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지금 이 밤은 왜 이리 어두운 걸까.


처음으로 집과 고향을 떠나 사계절을 지내고 있다. 떠나올 때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좋았다. 그동안 내가 쥐고 있던 것들은 하나같이 무거웠으므로, 가볍게 여행하듯 살고 싶었으므로. 태어나서부터 늘 한 사람에게 휘둘려 그에게 맞춰 살아왔던 나에게는 정말이지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나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무것도 없는 나는 객지에 툭 떨어져 아등바등 살아갈 뿐이다. 달라진 것은 없다. 가까이 있지 않아 좋은 그는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숨통을 조여 온다. 현실의 벽을 내손으로 두드리느라 살갗이 떨어져 나가고 상처가 아물 틈이 없다. 외로워하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모두 사치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느라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다시 서먹해졌다. 역시나 자연스럽게 내가 미워져 버렸다.


이러다 마음까지 가난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웠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미운 말로 내뱉고 부끄러운 줄 모르는 뻔뻔한 사람이 될까 봐 몹시 두려워 밤마다 울었다.


오늘도 그녀와 함께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똑똑하고 확실하게 물어오는 그녀의 질문들에 나는 수없이 미운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오늘은 내편을 들어주고 싶다. 똑똑하지 않고 확실한 것 없는 나를 보듬어주고 싶다. 나는 다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으려나, 작은 희망이 생겼다.


내가 있는 곳, 제주는 유난히 바람이 많다. 그래서 내 걸음이 이렇게 휘청거리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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