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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이쓰 Oct 25. 2022

서른 #2

봄에서 여름

2016년,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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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뒤돌아선 순간부터 눈물 한 바가지 쏟고 제주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밤새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걱정 없이 잘 자고, 그 어느 때보다 맑고 푸른 날 삼십 년간 박힌 뿌리를 뽑아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일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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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 사흘 만에 코피가 났다. 태어나서 이렇게 바쁜 일은 처음 겪는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틀어박혀 일만 하니 여기가 과연 제주인가 싶지만 출퇴근 길에 툭하면 눈에 걸리는 풀 뜯는 말 덕분에 그래 제주구나 한다.

어디 가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이곳이 어디든 달라지는 것 또한 없다. 나는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스스로를 기특해하며 일단 이번 주만 잘 견뎌보기로 했다. 이번 주가 지나면 또 일주일만, 그다음도 또 일주일만... 그러다 보면 한 달이 지나고 또 한참이 지나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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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바람, 미세먼지 때문에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애월로 가려던 계획을 접었다. 어젯밤 길을 헤매다 발견한 탐라도서관에 가서 주구장창 책을 읽었다. 부산에서 쓰던 도서회원카드를 여기서도 똑같이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받았다. 소설책 두 권과 제주여행책 한 권을 빌려 근처 로스팅 카페에 갔다. 손님한테는 불친절하고 사장님한테는 애교가 철철 넘치는 직원을 지켜보며 언젠가 시청했던 EBS 프로그램 <인간의 두 얼굴>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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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로 가는 버스를 타고 혹시나 잘못 탔을까 봐 기사 아저씨에게 확인했다. 처음에 거길 왜 가냐며 시큰둥해하던 아저씨는 신호가 걸릴 때마다 검색하더니 환승하기 제일 좋은 곳에 날 내려줬다. 본인도 한번 가봤는데 참 좋더라며.

경치는 아름다운데 땡볕에 내리 걸으니 역시나 찾아온 두통. 애써 외면하고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오랜만에 맥주를 한잔 했다. 경주와 다대포를 담은 필름에 제주 애월을 더해 한 롤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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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한 시에 걸려온 전화. 이름을 보자마자 무조건 받아야 했다. 울음 묻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사진 앨범을 보다가 분명 자신의 엄마 사진을 찾았는데 거기 내가 있다고. 그녀의 엄마이자 나의 작은 이모가 돌아가신 지 벌써 두 달이 되어간다. 혼자 쓸쓸하고 외롭지 않냐고 오히려 날 위로한다. 울다가 웃다가 세시가 되었다.

그녀에게 난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 밤이면 쓸쓸하고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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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올 때의 마음을 지키려고 더 열심히 돌아다닌다. 불편한 방법으로 느리게.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조금 지내보니 사람도 부산이 좋고 바다도 부산이 좋다. 꼭 이렇게 떠나봐야 안다. 이전에도 알았지만 더욱 절실히.

어차피 오래 머물 사람 아닐 테니까, 짐작하고 텃세를 부린다. 나도 여자지만 여자들의 입은 정말 무섭고 위험하다. 그렇다면 나 역시 어차피 평생 머물 거 아니니 마음 꾹 닫고 지내야 할까.

회사원이 아닌 여행자의 마음가짐과 차림으로 밖을 나서면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는다. 모두가 열린 마음으로 웃음을 나누고 도움을 주고받는다.

애초에 기대 같은 건 없었다. 오랫동안 떠나고 싶어서 떠나왔고 일을 하고 싶어서 일을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저 내 할 일 열심히 하면서 오는 이 안 막고 가는 이 안 잡고, 날마다 여행하듯 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같이 내 맘 같지 않다 해도 나는 그렇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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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서 가장 필요했던 사무용품 두 가지가 있었다. 스프링철이 된 파일과 여러 색이 있는 하나의 펜. 필요한 말만 하고 묵묵히 일만 가르쳐주는 사수 언니가 말없이 그 두 가지를 직접 사주었다. 난 분명 말한 적 없었는데 필요해 보였다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감동스러웠다. 누가 봐도 이 회사에서 가장 일 잘하고 멋진 대리님께 일을 배우고 있어 감사하다.

함께 지내는 숙소 친구들은 하나같이 착하고 따뜻하다. 심지어 모두 느리게 밥 먹고 위장이 안 좋고 저혈압이 있다. 벌떡 일어서면 어지러워 벽을 짚어야 하는 여자 셋이서 눈만 마주치면 깔깔거리고 웃기 바쁘다. 

한편에선 텃세를 부리고 조그마한 거라도 발견하면 험담을 늘어놓기 바쁘지만, 한편으론 즐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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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탐라대학교 정문까지는 잘 찾아갔다. 쭉 가면 될 것 같았지만 확인을 얻고 싶었다. 허허벌판에 딱 한 사람, 앞에 있는 아저씨께 길을 물었다.

홍가시나무길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고사리 캐려면 어디로 가야 되는지 알아요?

무슨 이런 동문서답이.. 자기는 고사리를 캐러 왔을 뿐인데 홍가시나무는 뭐고 홍가시나무길은 뭐냐며, 멀쩡한 젊은 아가씨가 혼자, 벌건 대낮에 왜 가시밭길을 가려고 하냐는 진지한 물음에 빵 터지고 말았다.

피차 모르니 각자 갈 길 가자 하고 돌아서는데 아저씨가 다시 날 불렀다. 그는 아침에 끓여 담아온 둥굴레차와 팥시루떡 한 덩이를 내주었다. 때마침 목마르고 배고프던 참이어서 거절하지 않고 고맙게 받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홍가시나무길보다 그 길을 찾아가는 길이 더 조용하고 좋았다. 쭉 이어진 홍가시나무 길을 한컷이라도 제대로 담고 싶었는데 주말이라 사람이 많아서 그럴 수 없었다. 그래도 목적지에 왔으니 촌스러운 기념사진을 찍고 싶었다. 삼각대도 없고 카메라를 둘 곳이 마땅찮아 입을 삐죽거리고 있는 차에 다시 만난 아저씨, 홍가시나무가 뭔지 여간 궁금한 게 아니어서 물어물어 왔단다. 일행인 것처럼 서로 찍어주었다.

나처럼 필카와 디카를 하나씩 들고 이것저것 번갈아가며 찍는 여자가 또 있어 날 좀 찍어달라고 fm2를 맡겼다. 오랜만에 필름에 담긴 내 모습이 궁금하다.

오후에 간 이중섭거리는 주말이라 차 없는 거리로 플리마켓이 열려있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팔찌 하나를 골랐는데 나의 탄생석이었다. 판매자 역시 나와 같은 달에 태어난 사람이라 가격을 깎아주었다.

이중섭의 편지글에 눈물 흘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보고 싶은 사람들이 갑자기 마구 떠올라 눈물 흘렸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더 슬펐던 것 같다.

엄청 오래된 것 같지만 이제 겨우 보름이 되었다. 일터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적응이 빠르다고 하고,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은 나를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하지만 고작 보름이다. 그러니 아직까지는 문득 눈물 흘려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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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면 정말이지 돌아오고 싶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돌아와 아픈 어깨를 부여잡고 열심히 일할 것이다. 쉬는 날이면 뛰쳐나가 제주 곳곳을 담기 위해 길을 헤매고 밤이면 여러 가지를 그리워하다 잠들기 위해서 말이다.

독립하고 싶었고 바쁘고 싶었으니까. 어디서든 묵묵히 나의 일을 하고 싶었으니까.

이러쿵저러쿵 무슨 말이 들리든 이미 단단한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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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다대포에 머물렀던 날이었다. 몇 날 며칠 흐리기만 하다 맑은 날이었고 햇살을 가득 품은 바다가 보고 싶어 다소 즉흥적으로 발길을 향한 것이었다. 준비하던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너무 지쳤고, 내 마음은 이미 제주에 가 있었다.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는데도 결국은 떠나게 될 거란 예감이 들어 날씨 좋은 부산을 더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단체로 출사를 나와 같은 자리에 삼각대를 놓고 우르르 찍는 사진이 싫었다. 피하고 피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찍은 그날의 한낮과 해 질 녘이 좋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그날 다대포에 가길 참 잘했다고. 앞으로도 마음이 향하는 곳에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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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는 인생이다. 다른 이의 봄을 부러워할 것도 없고, 나의 봄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을 한탄할 것도 없다. 천천히 온 봄을 느리게 만끽한다. 겨울이라고 마냥 춥지만은 않듯이 봄이라고 마냥 따뜻하지 않다. 서러움이 밀려들어 업무 중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며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괜히 미운 마음을 붙잡았다가 못나진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도 봄이라서 꽁꽁 싸매지 않아도 괜찮으므로 다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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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깊이 하되 많이 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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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만 버티자 하던 것이 한 달이 되었다. 하루에 수십 번씩 다 내팽개치고 돌아가버리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다. 내 인생에서 절대 풀 수 없을 것 같았던 숙제를 풀고, 바쁘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바람을 실현하고 있으니 감사할 일뿐인데 난 또 무엇을 불평하고 있었던가. 다 작은 일들이다.

한 달이 되었고 마음을 굳혔다.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이곳에 좀 오래 있게 될 것 같다. 그래서 공식적인 제주도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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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우도의 삼분의 이 이상을 두발로 걸었다. 우르르 몰려다니던 관광객들이 마지막 배를 타러 떠나고 조용해진 우도는 그때부터 진짜 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빛, 이런 하늘. 나의 움직이는 소리와 바람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자연과 생물의 소리만 들리던 우도봉에서의 일몰.

제주도에 와서 처음으로 옆에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혼자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외로웠다. 오래되어 느려 터진 폰은 마을에서 좀 떨어졌다고 더 먹통이었고 설령 폰이 잘 된다한들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좀 슬펐다.

해가 넘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보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내려가려던 참에 한 아저씨가 조금만 더 있다가 저 붉은 것이 바닷속으로 쏙 떨어지는 모습을 함께 보자고 했다. 더 무서웠다. 알고 보니 그는 우도봉을 지키는 등대지기였고 매일 보는 똑같은 풍경이 결코 똑같지 않음을 아는 사람이었다. 내 어머니의 고향인 강원도를 혼자 하염없이 걸어 다니며 여행했던 사람. 여행자의 마음, 특히 하루 종일 걷고 걸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는 동네 사람들만 아는 집에서 밥을 사주고 차로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다.

우도봉의 절경과 그 절경에 매일 반하는 등대지기, 아무도 믿고 의지하려 하지 않는 만큼 외로워하는 나 자신.

가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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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 처음 찾은 동네 카페에 단골 등록을 하고 사진을 업으로 하는 카페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부족한 것은 모두 제주가 채워줄 거'라는 그의 말.

어제 해 질 녘 만난 등대지기 아저씨의 '무엇이든 하고 싶을 때 하라'는 말.

아직 많이 못 만났을 뿐, 조금씩 나와 닮은 사람이 여기저기 있다. 안심이다.

부족한 것은 모두 제주가 채워줄 것이다.

난 무엇이든 하고 싶을 때 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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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과 사진이 예쁘지 않았으면 좋겠다. 투박하고 담백하게, 두고두고 봐도 질리지 않게 담아내고 싶다. 대중적이지 않은 것, 화려하지 않은 것이 좋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주에 와서 꿈만 더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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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나도 내가 그럴 줄 몰랐다. 어쩌다 보니 난 제일 많이 마셨는데 취하지 않았고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만 남았다.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 사람 자체가 좋은데 일도 잘하는 사람이라는 넘치는 칭찬을 들었다. 그들은 내가 얼마나 어리바리한지, 또 얼마나 낭만에 젖어 사는 기분파인지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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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땐 그걸 몰라서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 실망하고 상처받았다. 그렇게 무뎌져 진심을 쏟지 않게 되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나마 진심을 다하게 되는데 난 늘 후자였다. 통할 사람에게는 결국 통하니까.

그래, 결국은 통한다. 그것도 꼭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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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으면 기분 좋은 이야기들, 이를테면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친구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보냈다. 그토록 찾던 동네 서점을 드디어 찾아 책을 하나씩 사들고 살랑이는 제주바람을 따라 집에 돌아왔다.

봄과 여름 그 사이를 보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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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와서 백 퍼센트는 아니어도 그에 가깝게 마음을 준 사람이 두어 명 있다. 그중 한 명이 제주를 떠난다.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상실감이 크다. 며칠 전 부산을 다녀올 때만 해도 공항에서 눈물이 적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좀 더 단단해졌다고 뿌듯해했는데 아직 멀었다. 어젯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울었다. 내가 떠나올 줄만 알았지 떠나온 여기서 누군가 떠나갈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술에게도 지고 마음에게도 진 나는 병가를 내고 침대 속에 파묻혀버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소속된 그 어느 곳에서든 결석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덕분에 허리가 뻐근해지도록 잤다. 아직 남은 오늘, 실컷 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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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저절로 감길 때 잠들어 눈이 저절로 떠질 때 일어나 덜컹이는 버스를 타고 사람 없는 마을에 내려야지. 소담하게 피어난 수국과 물감을 탄 듯 빛깔 고운 바다에 넋을 놓고, 보고 싶은 마음도 접어놓고, 그렇게 한참을 머물러야지. 이번 주도 잘 버텨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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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보이지 않는 태양은 내 마음에 뜬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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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보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어쩌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그 대상을 찾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하필 그 순간에 같은 마음인 듯한 사람을 만나 스스로 당황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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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 벌써 두 달.

아프지 말아야지. 행복한 여행자가 되어야지.

사랑하는 마음만 가득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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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예쁜 곳을 하나씩 찾을 때마다 꼭 알려주고 싶고 같이 한 번 더 가고 싶은 사람을 이곳에서 둘이나 만났다. 그중 한 친구는 혼자 어딜 갈 때마다 나의 감탄사가 들리는 것 같다고 했다. 난 혼자 어딜 가서 감탄할 때마다 그 말이 떠올라 한 번 더 친구 생각을 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은 함께 용눈이오름을 오르기로 했는데 아직 어지럽고 피곤한 나 때문에 각자 원하는 곳엘 갔다가 오후에 만나 함께하기로 했다. 우리에겐 급한 게 없으니까. 마냥 붙어 있지 않아도 함께인 듯 아닌 듯 편안할 수 있어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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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3일에 쓴 글을 봤다.


나의 소소한 감정들을 누르지 않고 살게 해 달라고. 단지 자유롭게, 웃고 싶을 때 웃고 가고 싶을 때 가는 것을 바랄 뿐이라고. 몇 년 후 어느 날 털썩 주저앉아 아 그때 그 기도가 이렇게.. 하며 행복한 눈물을 찔끔 흘렸으면 좋겠다.


그래 난 소소한 감정조차 마음껏 표현할 수 없어 괴로워하던 사람이었지. 정말 눈물이 찔끔 났다. 그때는 항상 벼랑 끝에 내몰려 희망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길인가 싶어 가 보면 더욱 심한 가시밭길이었다. 매일 우울하고 아프고 답답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분명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밖에는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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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나에게 사랑은 사치라고 여겼다. 연애의 감정이 어떤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나랑 닮은 사람을 만났다. '맞아요', '나도 그래요'를 수없이 말하게 되는. 자꾸 보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친한 친구에게 하지 않는 이야기까지 다 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다 싶어 얘기하고 보면 공허함만 남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오히려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스무 살의 그것처럼 뜨겁지 않다. 하지만 기분 좋은 따뜻함과 편안함으로 넉넉히 차오른다. 사랑이란 할수록 커지는 것이므로 사치가 될 수 없다. 최선을 다해 사랑할 것이다.

하루에 몇 번씩 되뇌게 되는 말. 제주에 오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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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샤워를 하면 춥다. 오늘도 잠을 잔 듯 만 듯 일찍이 일어났고, 썰렁해지는 그 기분이 좋아 거의 찬 물로 씻었다. 오랫동안(이 '오래'라는 것은 누구나가 상상하는 그것보다 훨씬 오래된 '오래'일 것이다) 바라던 것들이 너무 한꺼번에 이뤄지고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만큼 아프고 힘든 일도 있지만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일들이어서 다행이다.

나는 무엇을 했나 생각했다. 그저 조금 용기를 냈고 평생 미워하던 이를 용서했고ㅡ그것은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기도 했다ㅡ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뿐, 때론 모든 걸 놓아버리면 날 외면하던 것들이 거짓말처럼 날 향하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역시나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 항상 기억해야지. 나의 중심을 잃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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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되면 어깨 통증이 극심해진다. 일 년 새 잊고 있다가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아 하루 종일 당황스러웠다. 이곳은 시도 때도 없이 안개가 자욱해 고통이 배가 되는 것 같다. 이럴 때는 취해야 잠을 자고 살 수 있다는 핑계로 파전에 막걸리를 한잔 했다. 보고 싶은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어딘가 모르게 치졸해지는 나 자신이 짜증 나서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또 깜빡 잊은 게 있다. 연애란 것이 나의 바닥을 얼마나 잘 드러내는지, 애써 다독여놨던 수만 가지의 감정이 들끓고 일어나 별스럽지 않은 일에도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말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면 되는데 그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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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아,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괘안나? 하고 한 아저씨가 물어왔다.

아뇨, 안 괜찮아요. 하고 답하자 작은 구멍가게 주인인 아저씨는 날 선풍기 앞에 앉히고 이온음료를 건네주었다.

경상도 분이세요? 하자 부산, 우리 집과 같은 동네에서 평생 살다가 제주에 온 지 5년쯤 되었다고 하셨다. 어쩌자고 이렇게 습하고 비바람 심한 날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다녔냐고 날 다그쳤다. 이렇게 몸을 혹사시켜야 잠을 잘 수 있다고 하니 내 얼굴을 구멍이 나도록 뚫어지게 쳐다보던 아저씨의 눈빛이 오래도록 날 따라다닐 것 같다.

뒤늦게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도 안 괜찮은 거 안다며 택시를 태워주었다. 아저씨 덕분에 정말 괜찮아졌다.


66

나는 두려웠다. 내가 누군가에게 새로운 부담이 될까 봐. 그렇지 않다는 한마디를 듣고 싶었는데.


67

부산 생각이 자꾸 난다. 청사포를 걷고 싶고 커피 미미에서 맛있는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고 엄마와 언니가 보고 싶다. 온몸이 녹아내릴 듯 더워지기 전에.

결국 이 가슴속엔 사랑하는 마음만 남았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리운 마음 안고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지. 비가 오나 흐리나 아름다운 제주처럼 변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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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역시 집이 제일 편하다는 것.

하지만 편하자고 여행하는 것이 아니므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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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겪어봐야 아는 어리석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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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라도 상관없었다. 오늘 밤은 정말 혼자 있기 싫어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생전 처음 막창을 먹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가벼운 얘기를 나눴다. 그들은 굉장히 수다스러웠다. 들어주고 맞장구치고 웃으면서 마음속 응어리가 말랑해지는 걸 느꼈다. 가끔은 이렇게 어울리는 것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71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남 탓을 하느니 내 탓을 하는 것이 편해서 늘 내 탓을 했다. 이젠 그러지 말아야겠다. 나한테 너무 미안하다.


72

무엇이 자꾸 왔다가 간다. 아니 오다가 가버린다. 짧은 만남과 긴 상실감의 연속. 담담하게 받아들이지만 마음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애써 감추지 않고 속상한 것을 속상해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 지나고 보면 결국 나에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일 것이다. 이제껏 그래 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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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는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

언제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74

멀리서 봐야 아름답고 잘 몰라야 설렌다. 하지만 현실은 아름답지 않고 우리는 대부분 설렘을 찾아 떠나고 싶어 한다. 가까이, 곁에서 궂은날에도 함께 하는 것, 잘 알아서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 그렇게 지켜나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제주를 점점 더 사랑하고 있다.


75

엊그제는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고 어제는 하루 종일 흐리고 습하더니 오늘은 맑고 푸르고 시원한 바람이 살랑였다.

사려니 숲길을 걷고 부자농부의 한상차림으로 속을 든든히 채웠다. 맑은 날의 비자림 숲 속에서 파도소리를 들었다. 두어 달만에 다시 찾은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선 한 맺힌 판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깜깜한 밤중에 올랐던 용눈이 오름을 올랐다. 몸을 가누지 못하도록 거센 바람이 불었지만 순간순간 변하는 하늘이 아름다워 한참을 흔들렸다.

오늘도 정말 잘 놀았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 기분.

이토록 눈부신 하루를 처음 만난 사람과 함께했다. 오랜만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어린애처럼 들떴다. 가끔 사람들은 묻는다. 어찌 그리 너 같은 사람을 잘 만나고 다니냐고. 또 어쩜 그렇게 겁이 없냐고. 그러게나 말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열심히 여행할 뿐이다. 많이 다니면 마음에 드는 곳이 분명히 나타난다. 목적지로 가는 도중 몰랐던 곳을 알게 되어 거기 머물러버리기도 한다. 그곳엔 사람이 있다. 수없이 많은 사람 중에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지난밤 그러한 친구와 소주 세 병을 두고 주거니 받거니 홀짝였다. 우리의 결론은 두 가지였다.

고민할 가치가 없는 것은 고민하지 말 것.

아직 못 만난 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마음 문을 활짝 열되 방충망을 잊지 말 것.

가도 가도 갈 곳이 많다. 만나도 만나도 만날 사람이 많다. 조바심 낼 건 없다. 낭만을 즐기며 천천히 뚜벅뚜벅 걷다 보면 낯설지 않은 풍경을 마주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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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돌아온 기사 아저씨의 텅 빈 눈동자.

우울증 때문에 돌연 사라졌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온 직원.

이곳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라 여겼던 친구의 사직.


내일로 석 달. 세월은 잘 가는데 나는 단단해지고 있는 걸까, 무뎌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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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문이 열린다. 그것이 닫히기 전엔 알 수 없어서 불안하고 두렵다. 큰 용기가 필요할 때 가장 힘이 되는 사람을 만났다. 함께 했던 이들은 새로운 나의 길을 응원해준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또 무엇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해보지만 여전히 어리고 미숙한 내 모습을 발견할 뿐이다.

어제도 모르는 길을 신나게 걷다가 길을 잃었다. 영화 속에나 있을 법한 크고 사나운 개를 마주했다. 주어지는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다. 그러니 게으르고 귀찮음이 많은 사람임에도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룰 수 없다. 최선을 다해 살고 사랑하고 감사해야 한다.


78

누군가를 기다릴수록 밤은 길고 깊이 의지할수록 더욱 외로워진다. 차라리 줄곧 혼자이면 괜찮은데 말이다. 늘 고민한다. 철저히 혼자가 될지 외로움을 벗 삼아 함께가 될지. 어렵다.


79

답답하고 속이 상해서 마시고 마셨다. 내일 아침 정신을 차리면 후회할 일을 이미 했고 또 할 것 같다.

무작정 곁에 있어달라는 게 아니다. 그저 보고 싶다, 네가 좋다는 말이면 충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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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생활하면서 다시는 아프지 않으려 마음먹었건만 또 병이 났다. 예상했던 일이었음에도 나는 왜 멈추지 않았던가. 제주도에 와서 두 번째 응급실행. 그래도 이번엔 상술에 넘어가지 않고 급한 치료만 받고 돌아온 스스로를 기특해하고 있다. 오늘은 울지 않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갔으니까 더욱.

자유의 대가가 크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니 최대한 담담하고 꿋꿋하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헤처 나가야 한다. 마음 단단히 여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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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li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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