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도 멘도: 판타스틱 시티 라이프"에서 다시 시작.
1.
지난 토요일 스페인 출신의 일러스트 작가로 도쿄를 거점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루이스 멘도(Luis Mendo)의 전시회를 다녀왔다. 전시가 시작되었을 무렵부터 꼭 가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최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반나절을 쉬기로 정한 날인 일요일에 서울에 비와 바람이 거셀지도 모른다는 일기예보에 몸을 바삐 움직여 다녀왔다.
2.
근래 서울이라는 도시의 삶이 무엇일까, 하고 종종 생각해보고는 했다. 서울에서 산 시간이 전체 삶의 절반에 가까워졌고, 서울에서 몇 번의 큰 변화를 겪었다. 변화를 넘고, 다시 내 삶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진정 서울은 내게 어떤 도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서울에서 내 삶은 어떤 모습인지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전시회의 부제에 특별히 매력을 느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루이스 멘도라는 작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의 작품을 접한 기억도 없었다. 그러나 들어본 적이 없는 작가가 마드리드, 암스테르담 등에서 활동하다가 도쿄에 터 잡고 서울에서 환상적인 '도시의 생활'이라는 이름을 걸고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3.
토요일 아침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전시장에 있었다. 다만, 전시가 막바지를 향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간 관람을 위해 찾았던 그라운드 시소 서촌의 다른 전시회에 비해서 관람객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날은 특별히 초등학생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많았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가며 작품을 저장하는 아이들의 분주한 모습, 루이스 멘도에 대한 짧은 영화를 바닥에 앉아 집중해서 관람하는 진지한 모습이 특별히 인상적이었다.
전시의 내용이 예상했던 것과 같이 도시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시선이 담긴 새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처럼 읽히지는 않았다. 전혜린 작가의 뮌헨 슈바빙(Schwabing)에 대한 예찬과는 결이 다소 다른 느낌이었다. 곧 작가가 살았던 장소가 주었던 특별한 감정이 전시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주된 힘은 아닌 것 같았다.
대신에 작가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 예컨대, 작품 활동의 방법, 활동 거점이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에 두고, 작가의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시가 구성되어 있었다. 루이스 멘도라는 한 사람의 생활과 주관적 성찰-성찰이라고 하지만, 어떤 미학적, 윤리적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즐거움과 의미를 찾는 수준의 성찰-이 전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것이다.
그 주관적 사유가 담긴 공간에 대한 포착과 재현의 과정을 통하여 물리적이기에 의미의 측면에서 공허에 가까운 공간인 도시가 의미를 지니게 되고, 도시 이야기라는 '환상(fantasy)'이 관람자에게 포착되게 하고 있었다. 사유를 통한 사회적 실재의 구성(construction)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하면서 도시와 도시에서 보낸 작가의 소소한 삶을 전시 공간에서 재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더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영감을 주는 사람과 그 사람들이 사는 도시라는 공간을 부지런히 포착하고, 해석하면서 작가는 객관적 실체가 아닌 주관적 구성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판타스틱 시티 라이프(fantastic city life)라고 하는 부제를 붙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얼마 전 변화로 인해 익숙한 것들이 너무나 자주 사라지기 때문에 서울살이가 특별히 어렵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변화의 속도에 맞춰 새로 찾은 공간에 애정을 붙여야만 할 것 같다고 쓴 적이 있다. 문도 멘도를 보면서 그때 내가 두었던 생각의 중심이 어딘가 잘못 놓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곧 도시의 장소들은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에게 홀리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묶었던 돛대와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선가 위에서 관찰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대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전시를 보며 떠올린 루이스 멘도의 삶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새로운 작품활동에 힘을 쏟기 위하여 생활의 모습을 단순하게, 또 어느 정도 정형화시켜 나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애정과 그 애정을 계속해서 지키려는 의지가 이끌어가는 것 같았다. 아마 루이스 멘도가 도쿄에 머물며 하루하루 성실하게 작품생활을 하며, 더 좋은 작품생활을 위하여 생활을 단순화시켜 나갔던 의지는 도시에서 도시에 대한 생각의 중심을 달리 두었기 때문에 생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서울에서 느낀 상실감과 무력감, 그리고 무력해지지 않기 위해서 쉬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들은 내가 느낀 루이스 멘도의 생활감과는 달랐다. 멘도의 생활은 어딘가 건강해 보였고, 나의 삶은 어딘가 지쳐 보였다. 결국 중심을 옮겨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 도시의 변화는 필연이고, 그 변화 속에서 의미를 포착해 기록하면서 힘을 얻어야 할 대상이라 여겨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5.
삶을 긍정하기 위한 준비는 그 중심을 내게 고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중심을 내게 두는 순간, 내가 시선을 옮기는 모든 대상들의 의미가 나를 위해서 세워질 것이다. 그리고 의미를 붙이며 삶의 영감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영감이 충만한 생활은 삶을 활동적이게 만들고, 또 생산적이게 만들 것이다. 결국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생활로부터 살아있음을 느끼며 삶을 긍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도시에서 내 삶의 판타지가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