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마음으로, 여섯 개의 질문을 다시 읽으며
매주 토요일 오전, 느린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세상과 일상을 연결지어 찬찬히 바라보려고 이 시리즈 ‘삶을 개발, 개발을 삶’을 쓰고 있습니다.
매번 글 끝에 질문을 남겨두며, 읽으시는 분들이 어떤 답을 떠올리실지 궁금했습니다.
저 또한 생각했습니다. “내가 독자라면?”
그래서 오늘은, 그동안 제가 남겨두었던 질문들에 대해 저 나름의 답을 나누려고 합니다.
혹시 생각해두신 바가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기쁘게 읽고, 저도 답글로 의견을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자, 시작해볼까요?

질문 하나. 한 사람의 삶은 전 세계인의 삶과 얼마나 닿아 있을까요?
저는 이른바 ‘대한민국 지방’ 어느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실 저는 ‘지방’보다는 ‘지역’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합니다. 중앙에서 벗어난 타지로 구분되지 않는 곳이라는 감각이 있어서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 태어난 그곳이 온 세상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나라들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UN 회원국만 해도 193개국이라는 것을 압니다.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많은 나라와 사람들이 공존하는 촘촘한 곳이라는 걸 느낍니다.
지금 저는 지역에서 도시외교 업무를 하고 있고, 전문 분야는 개발협력입니다.
제가 사는 곳의 특화 분야를 개발협력 사업으로 만들기도 했고,
지금은 지역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된 외국인 정주, 유학생 유치 관련 업무도 하고 있습니다.
지역에 앉아 있지만, 일상은 이미 국제사회와 닿아 있습니다. 함께 일하는 공간에도 외국인 동료가 있고,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의 언어도 어느새 더 다양해졌습니다.
더 직접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내는 NGO 회비는 누군가의 현장 활동에 필요한 운영비가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후원 아동에게 가 닿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대하고 거창한 방식은 아닐지라도, 저는 이렇게 세상과 이어져 있다는 감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회사에 다니던 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2007~2008년, 해운·항만 업계에 있었을 때 경기의 찬바람을 몸으로 겪었습니다. 번화하던 사무실 밀집 지역이 조용해지고,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지던 시간들이 기억납니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흘렀지만, 지역에서 세계를 만나는 삶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질문 둘. 연결이 더 나아지게도, 더 나빠지게도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 앞에서 저는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라고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직접적으로 외국인을 돕는 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사용하는 세제나, 내가 버리는 쓰레기들이 어느 날 해외의 개발도상국으로 수출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또 어떤 순간에는, 내가 쓰는 향수나 소비재가 먼 나라의 노동 착취와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걸 알고 나면, 내 편의가 누군가에게는 착취와 빈곤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간간이 쓰던 향수도 요즘엔 손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잘 모릅니다. 아니면, 머리는 알지만 제대로 느껴서 아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내가 사용하는 그 “무언가”가 누군가의 고된 노동 위에 놓여 있는지, 혹은 어떤 생태계의 손실 위에서 만들어졌는지.
그 “모름”이 많다는 사실이, 저를 슬프게 합니다.
질문 셋. “미운 얼굴을 하면, 미운 내가 된다.” 지금 세계는 서로를 어떤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얼마 전 제프리 엡스타인 사건 관련 기사를 보며, 블러 처리되거나 검은색으로 가려진 얼굴들을 보았습니다. 가려진 얼굴들. 사람들은 그 얼굴이 누구인지 추적하고, 파헤치고, 증언을 모읍니다.
어떤 사람을 볼 때, 어떤 사건을 대할 때—상대가 누가 되었든—나는 고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방관자가 되거나, ‘흐린 눈’이 되거나, 혹은 단지 호기심 많은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묻게 됩니다.
사람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오늘, 어떤 얼굴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질문 넷. 내가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가 타인에게도 의미가 있을까요? 노벨평화상, Quo Vadis
평화상을 주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양도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고 해도, 결국 상을 받은 뒤에 벌어지는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냉정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양도가 문제라면, ‘박탈’이 가능해야 한다고요.
명예를 더럽히고, 상의 취지를 정면으로 훼손한다면, 상을 주는 제도 역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위원회가 완벽하거나 무결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상이 인간이 만드는 제도라면, 상을 받는 사람 역시 인간으로서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요?
불완전한 인간이 주는 상이라도, 가능하다면 더 완전한 평화를 향해 작동하도록—그 제도의 설계도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다섯. 우리는 언제쯤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고운 눈으로 살려면 무엇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역사를 돌이켜보면, 국내 정세가 좋지 않을 때 일부 지도자들은 공공의 적을 만들거나 외부 세력을 적대시하며 관심을 돌리기도 합니다. 개인도 비슷합니다. 여러 심리적 단계를 거치지만, 내 안에서 답이 나오지 않으면 외부에서 원인을 찾고 싶어지곤 합니다.
반대로 경제적으로 풍족하거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늘 그렇지는 않지만—상대에 대한 혐오나 적대가 덜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전후 버블 경제 시기에 고노 담화처럼 역사적 과오를 되짚으려는 시도가 있었고,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며 사회 분위기가 급격히 바뀌어 우경화가 강화되는 흐름도 관찰되었습니다. (물론 한 가지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요.)
유럽 역시 난민 문제에 비교적 열려 있던 태도가 시간이 지나며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흔히 “경제 문제가 해결되어야 평화를 말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갑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한 번 더 묻고 싶습니다.
갈등과 분쟁의 당사자들이 모두 경제적으로 빈곤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하마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례를 보더라도 이해당사자의 경제적 조건은 각기 다릅니다.
그렇다면 경제적 풍요의 ‘유무’보다, 결정을 내리는 국가 체제와 리더, 권력 집단이 체감하는 결핍—두려움, 불안, 통제 욕망—이 더 큰 원인이 되는 순간도 있는 건 아닐까요?
여유는 단지 숫자로만 환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질문 여섯. 삶에서 평화로운 시간은 어느 정도 이어져 왔는가? 그 평화는 ‘성취’였나, ‘알아차림’이었나?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크게 기억에 남는 날들보다 기억나지 않는 날들이 더 평화로웠던 것 같습니다.
기쁨은 대체로 기다림 끝에 오거나, 어떤 노고 이후에 찾아왔고, 슬픔과 고통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닥쳤을 때 뇌리에 깊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해보고 싶습니다.
내게 평화로운 시기는 ‘기억이 없는 날들’ 속에 있었다고요.
그리고 더 생각해보면, 그 평범한 날들은 제 감정과 마음과 생각과 상관없이—내가 태어난 이후 ‘주어진 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평화는 그대로 있는데,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혹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자꾸 떠나오기 때문에 평화롭지 않은 것이 아닐까.
어쩌면 틸틸과 미틸이 찾아 헤맨 파랑새처럼요.
다음 주에 찾아올 이야기는 ‘문화는 힘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최근 평화롭지만은 않은 세상에서, 눈과 귀를 즐겁게 하며 달라지는 세상 분위기를 읽게 하는 것이 문화여서요. 아마도 여러 이야기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인사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읽어주시는 여러분, 감사합니다. <3 <3
저도 느린 걸음으로, 타닥타닥 꾸준히 이어가겠습니다.

心知와 같이 세상을 마음으로 알고, 세상을 밝히는 촛불의 心指처럼 씁니다.
*** 본 계정의 글은 개인의 견해이며,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무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