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차별의 시작은 생각에서
※ ‘slant-eye’는 인종차별적 비하 표현이며, 이 글에서 비판·분석 목적의 인용으로만 사용합니다.
Slant-eye 같은 표현을 보면, 단어로도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미스 핀란드 사건처럼 누군가는 사과하고, 누군가는 동조하며 오히려 더 부추기고 혐오 행위를 반복하게 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저는 어느 누구도 평화롭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혐오 표현의 대상이 되었던 아시아인들은 사건을 접하고 충격과 분노를 소셜미디어와 언론을 통해 표현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행복하거나 만족스러울 수 없는 상태입니다.
분명한 건, 이런 사건이 이대로 끝날 이야기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질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말하고 표현해야 하나?
‘하지 말자’는 말만으로 충분할까?
해당 표현을 찾아보니, 사전·용례 자료에서 19세기 무렵부터 기록이 확인된다고 설명합니다.[1][2]
그러다 보니 저는 자연스럽게, “그때는 어떤 분위기였을까?”라는 쪽으로 시선이 옮겨갔습니다.
관련 자료를 찾다보니 ‘중국인 문제(The Chinese Question)’라는 책에서, 당시 중국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국제질서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사람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기 위해 미국 등으로 이주했다는 역사적 배경을 다루고 있었습니다.[3] 이방인으로 도착한 곳에서 이주민들은 경제적으로 원주민들과 경쟁하고, 현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여러 갈등과 차별을 경험했습니다. 백인 중심의 주류 사회가 이주를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 속에서, 이런 정서가 언어로 표현되고 반복되며 굳어지는 과정도 함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주가 문제인지,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인지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배제하고 조롱하는 사고방식은 표현되고, 그 표현이 사회에 자리 잡으면 행동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주 단순한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만약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반감이 아니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사회였다면, 이런 표현은 조금은, 아니 훨씬 줄어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문제 없는 상태’를 떠올려 보게 됩니다.
문제를 문제로 만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문제를 문제로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말입니다.
그러면 최소한 누군가를 조롱하며 상대를 상처 주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될 테지요.
결국 제 생각은 ‘사고방식’으로 돌아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하고, 문제 없는 상태를 상상하고, 더 적극적으로는 문제가 있어도 해결되는 상태를 떠올릴 수 있다면 삶도 세상도 나아지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저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개발협력을 가르치는 책들은 어떤 언어와 전제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국내에서 주로 읽히는 책들과, 아마존에서 검색하면 상단에 노출되는 책들의 목차를 중심으로 훑어보았습니다. 물론 더 널리 쓰이는 교재가 있을 수 있고, 전문가 교육 과정의 표준 교재가 따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일반적인 검색으로 누구나 접근 가능한 경로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텍스트’가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우선 구글에서 ‘개발협력 교과서’ 관련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검색일: 2026년 1월 17일) 다음과 같은 목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4]
국제개발협력 입문편(개정판) – KOICA ODA 교육원
국제개발협력 심화편(개정판) – KOICA ODA 교육원
국제개발협력개론 – 베리 베이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장 지글러
다음으로 아마존에서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으로 검색했고(동일 검색일), 특정 지역 연구나 국제학 일반서를 제외하고 연관성 중심으로 상단 노출 도서를 확인했습니다.[5]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Theory, Practice, and Evaluation
Transforming International Cooperation: Thoughts and Perspectives on Moving Beyond Aid
Aid: Understanding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Development: Approaches, Actors and Issues
그리고 가능한 범위에서 Google Books를 통해 목차를 찾아보았습니다.
최근에 발간되는 책일수록 개발의 개념을 다층적으로 설명하고, 개발협력·원조가 남긴 영향, 빈곤과 격차의 문제, 권력과 제도의 쟁점을 다루며 ‘행동’과 ‘변화’를 촉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결국 “잘 사는 삶”을 정의하고 이야기하는 밑바탕에는 서구식 모델을 기준으로 삼거나, 그 기준을 비판하면서도 그 기준을 참조하지 않고는 논의를 전개하기 어려운 구조가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Post-Development Theory 같은 대안적 개념이 등장했음에도, 개발의 통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기는 여전히 어렵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마치 slant-eye의 반대말을 쉽게 찾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여유가 있고, 미워하지도 않는 상태라면, 누군가 그런 말을 꺼낼 때 “안 된다”는 말로만 끝낼까요?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 따져보고, 근원적으로 어떤 생각에서 비롯되었는지 성찰하고, 그 생각을 벗어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내려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기후변화 대응을 두고, 행동 변화를 촉구하는 쪽과 기술·재원의 부족을 말하는 쪽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개발협력을 설계하는 것이 현재의 방식이라면,
아예 서로가 동참한다는 전제 속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역할을 나누어 실행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여유가 있다면 손해를 먼저 떠올리기보다, 최소한의 공존과 이익을 택할 가능성이 커질 것 같습니다. slant-eye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더 나아가 조롱을 언어로 굳히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삶 속에서 가능해진다면,
저는 그것이 개발의 길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글을 쓰는 날,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트럼프에게 자신의 메달을 전달(선물)했다’는 제목의 보도를 보았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국제기구에서 빠지겠다고 선언한 미국의 선택이 국제사회 개발협력의 흐름과 어떻게 교차하는지, 다음 글에서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저는 질문해봅니다.
과연 우리는 언제쯤 여유를 가지고 이 삶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고운 눈으로 살아갈 수 있으려면, 우리는 얼마나—그리고 무엇이—여유로워져야 할까요?
心知와 같이 세상을 마음으로 알고, 세상을 밝히는 촛불의 心指처럼 씁니다.
**본 계정의 글은 개인의 견해이며 소속기관의 공식 입장과 무관합니다.**
[1] Slant-eye 검색
https://share.google/aimode/Lq16Pje4o4M9LTJa1
[2] Slant-eye 어원
https://share.google/aimode/ZA0PcHQ5PH27sAnNY
[3] 책소개-중국인 문제
https://www.khan.co.kr/article/202403220830001
[4] 국제개발협력도서 검색(구글)
https://share.google/aimode/LaKhWTeovh0VHn9ye
[5] 국제개발협력도서 검색(아마존)
(추가 참고: Dictionary.com / Oxford Reference ‘slant-eye’ 항목, 미국 국제기구 탈퇴 관련 백악관 메모(2026.1.7) 및 Reuters 보도, ‘노벨 메달 전달’ 관련 TIME 기사 — 다음 글에서 정리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