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한 학업이 큰 이점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 다른 사람들은 군생활 동안 시간낭비를 하게 될 테니, 나는 카투사 복무 기간 동안 공부에 매진해 전역 후 빠르게 나아가자고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기초 군사 훈련 후, 나는 매달 플래너를 써가며 경제학 기본 과목을 복습했고, 선형대수학과 미분적분학을 독학했다. 영어에도 욕심이 생겨 생활 회화도 연습했고, TED를 보며 영문 강연, 영어 신문 같은 학술적인 컨텐츠에 열도 올렸다. 하물며 지금도 복학 후 수강할 과목들을 예습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이 나를 바꿀 거라고 믿으며.
그러나 찬찬히 돌이켜보면 군생활 동안 스스로 발전했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은, 앞선 학업들이 가져다준 지적 성취는 아니었다. 경제학 복습을 했다고 경제신문을 보는 식견이 더 넓어지지도 않았고, 수학이나 회계 공부를 했다고 사고가 더 기민해지지도 않았다. 1년 8개월 동안 달라졌다고 하는 부분들은 당연하게도 매일매일 함께 생활했던 미군들에게 배운 삶의 태도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농담조로 하는 얘기지만 일단 성격 자체가 바뀌었다. 내가 그런척 하는 걸까, 정말 바뀐걸까?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 어떤 점이 그리도 달라졌는가? 불행히도 이를 명쾌하게 답하기는 쉽지 않다. 가벼운 논의로 시작하자면 고상한 척 펜과 노트를 쥐던 '청렴결백한 논리 주의자'가 기다란 자를 들고 상대방을 요리조리 제단 하려고 벼르고 있는 '엄격한 관리자'로 바뀌었다.
재미있는 점은 입대 전 논리주의자의 성격에 큰 공감을 하던 내가, 입대 후 관리자 성격에 오히려 더 호응하며, 동경까지 한다는 것이다. 성격의 구성 요소를 따져보면 논리주의자와 관리자의 차이는 내향적 성향과 외향적 성향뿐이지만, 나는 어느새 과거의 내가 신경 쓰던 여러 가지를 무던하게 여기고 있고, 되려 과거의 나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사항들을 꼼꼼히 체크하고 있다. 설명할 순 없는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하의 논의에선 내가 미군들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서술할 것이다.
Know the Right, Do the Right
오프라 윈프리의 명언이지만, 미군이 주지하는 Right thing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
"Know the Right, Do the Right"이라는 격언은 '엄격한 관리자' 형을 상징하는 말이자, 내가 미군과 생활하면서 많이 듣고 체득한 말이기도 하다. 미군 주임원사의 강연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이 격언은 6.25 전쟁 추모비에 적혀있는 "Freedom is not Free"와 함께 미군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옳은 일(Right)' 이란 크게는 미국이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즉 자유 중심의 사회 풍조를 저해하는 세력에 대한 경고이자, 작게는 우리의 일상에서 '개인의 품위'를 드높이는 '옳은 일' 들을 게을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권고다. 허나 저마다 생각하는 '올바른 행실'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강요하는 것은 불만을 야기할 수도 있다. 가령 이불을 정리하라고 강요받는 것만으로도 선택의 자유를 침해당한다는 기분이 들 수 있다.
이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롤스와 센델이 치열하게 고민한 주제다. 개인의 권리(선택의 자유)와 보편적 선(善) 중에서 무엇이 더 우선되어야 하는가는 그 당시 '정의'와 관련된 담론을 관통하는 주제였다.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했던 롤스와 센델은(센델은 더 소극적이었지만) 결국 권리를 선(善)보다 앞에 두었다. 실제로 선택의 자유와 보편적 선(善)의 갈등은 철학적으로도 많은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논쟁거리다.
그러나 단언컨대 미군에선 선(善)이 권리에 앞선다. 부대 내엔 일상생활 곳곳에 규칙이 있고, 미군들은 그것에 대해 거부감을 지니지 않는다. 되려 일상 속에서 '올바른 행실'을 지켜나가는 것을 의무이자 특권으로 여기며 그 과정이 그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고 믿는다. 입대 전 사회에서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에 상관없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선(善)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물론 '올바른 것'에는 웃음이 날 정도로 사소한 사항들이 즐비하다. 예컨대 이불 정리하기, 매일 운동하기 등의 생활 속 지침들부터, 동료 챙기기, 상위 계급에 복종하기 같은 조직적 규율도 존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불을 빨리 정리하는 방법이나 지나가는 장교진들에게 칼 같은 경례를 하는 법이 아니라, 선(善)을 따라가면 결국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그 확고한 믿음이다. 더 나은 사람이 더 좋은 환경 속에서 더 이성적인 선택을 한다는 믿음의 고리는, 더 이상 선(善)과 선택의 자유를 구분 짓지 않는다. 미군들의 기준에선 훌륭한 과정의 끝엔 더 좋은 결과가 있다.
'엄격한 관리자'형은 성공한 비즈니스 리더들에게서 많이 발현되는 특징이라고 한다. 관리자로서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조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유형이다. 허나 그 반대급부로, 자신의 엄격한 규칙(여기선 미군이 지향하는 '올바른 행실')을 다른 조직 구성원들에게도 강조하기에 관련된 마찰이 잦다.
새로 건네받은 성격 유형을 보면서, "내 행동이 옳은지 확신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한테 무턱대고 강요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결국엔 미군이 지니고 있는 그 믿음에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마찰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옳다고 믿는 일을 꾸준히 행하는 것이다.
초반에 언급한 주임원사의 강연에서, 그는 사람들은 '떳떳하고 정통한' 자를 따른다며, 우선 프로페셔녈한 리더를 목표 삼으라 조언했다. 그러기 위해선 언제나 "왜(why)" 그리고 "어떻게(how)"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병사들을 다독였다. 흔한 자기 계발 서적 속 한마디 일 수도 있지만,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인생에 대한 교훈을 전하는 느낌이 들었기에,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남았다. 주임원사가 강조한 것처럼 단순히 '엄격한 관리자'에서 머무르지 않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성공적인 관리자'가 되는 것이 새로 생긴 목표다.
내가 정의하는 '더 나은 사람'이란 이런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 아닌가 싶다.
장백기(드라마 미생 中 등장인물)는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정직원으로 입사한 수재다. 그가 인턴 생활을 마무리 후, 새로 배치받은 부서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를 드러낼 수 있는 프로젝트 신청서를 제출하는 일이었다. 이를 살펴보던 직속 상사 강대리는, 그만의 방식으로 장백기를 길들이고, 길들임의 끝에서 기본부터 배워 나가야 한다는 사실 앞에 고민에 빠진 장백기에게 강대리는 넌지시 조언을 건넨다.
남들에게 보이는 건 상관없다, 화려하진 않아도 필요한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
미군은 화려하지 않다. '세계의 경찰'을 자청하는 국가의 군대이기에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험난한 전투를 치르고, 대비해야 한다. 힘들고 고된 업무에 비해, 평상시엔 그들의 노력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종종 동기부여가 약해질 때가 있지만, 모두들 앞서 등장한 강대리와 같은 태도를 견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화려하진 않을지라도 필요한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자신의 희생엔 무던해지되, 남들의 희생엔 진정으로 감사할것.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지코가 스윙스의 유튜브 채널에서 이야기한 리더와 희생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남들에게 과시할 화려한 일을 제쳐두고 조직과 국가를 위해 움직이는 것엔 개인적 희생이 뒤따른다. 미군은 병사들에게 끊임없이 휴식 시간을 반납하라고, 당신만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라고 소리친다. 주어진 업무를 넘어서 한 걸음씩 더 나아가는 수고로움을 감내할 때야 비로소 미군이 추구하는 '더 나은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된다.
어쩌면 미군은 모든 병사들에게 리더로서의 자질을 주입하며,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내가 만난 미군들은 사소한 불평을 할 지라도, 필요한 일을 완수하는데 감내할 희생에 상당히 무던하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희생엔 몇 배의 존중을 표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행실을 통한 떳떳한 리더의 형성', 이 과정이 내가 미군과 함께 생활하며 얻게 된 중요한 자산이다.
스윙스가 물어본 리더의 자질들 2-3가지에 대해 지코는 한 가지 굵직한 의견으로 응수했다. 리더란 희생이라는 통증에 무던해야 한다고, 물론 합당한 말이다. 나는 이에 더불어 타인의 희생에는 더 높은 존중과 감사를 표하는 것이 바로 리더가 가져야 하는 자질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난 리더라는 위치에 욕심이 없다. 이제는 같은 조직이라도 그때그때 어떤 문제를 직면하는가, 어떤 분위기가 요구되는가에 따라서 리더 역할을 맡을 구성원이 바뀔 수 있는 시대다. 오히려 누누이 이야기했다시피, 어떤 문제를 마주 하던가에 상관없이, 화려한 일보단 묵묵히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추상적으로 알고 있던 개념을 매일매일 눈앞에서 보여주며 내게 영감을 준 미군들에게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