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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완 Jun 07. 2022

퇴근 후엔 영화보지 마세요

그럼 내가 일해야하니까

내가 새롭게 이직한 회사는 영화투자배급사였다. 사실 나는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영화 감독 이름도 잘 모르고, 좋아하는 특정 장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요즘 어떤 영화가 흥행한다더라, 라고 하는 소문이 들리면 그제서야 그 영화를 보는 정도의 평범한 관객이었다. 그런 나를 회사가 왜 받아줬는지 좀 의문이었는데 당시 면접을 본 팀장님은 한마디로 대답해주셨다.



그런 사람한테 마케팅하는 게 우리 일이니까



영화에 관심없는 사람을 관심가지게 하고 보게 만드는 일, 그게 영화마케팅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렇게 나는 영화 마케팅의 타깃이자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영화에 원래 깊은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영화계의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들어갔던지라 초반에는 업무를 파악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영화 제작사와 투자배급사의 차이도 몰랐고 회사 내의 팀들이 각자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고, 회사의 분위기도 워낙 달라서 적응이 힘들었다. 대기업 광고대행사를 다닌 나는 체계적이고 시간 엄수가 칼같아야 하고, 모든 게 갖춰진 시스템 안에서 업무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새로 이직한 회사는 그와는 아주 반대에 있었다.



광고회사도 시스템은 갖춰져있으나 제조업이나 타 대기업에 비하면 자유로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곳의 자유분방함은 내 상식과 기준을 뛰어넘었다. 물론 회사이다보니 기본적인 체계는 있었지만 영화는 ‘작품으로 생각’하다보니 ‘아티스트’와 ‘퀄리티’가 체계보다 우선되고 있었다. 이는 이 업계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나는 종종 ‘소크라테스의 악처’가 된 기분을 느꼈다. 현실을 뒤로한 채 이상과 논리만 꿈꾸는 소크라테스와 먹고 사는 생계를 걱정하며 소크레테스를 닥달한 악처 크산티페. 분명 지금 태어났다면 그녀는 악처라는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더 좋은 퀄리티를 위해 수정을 하고, 잠수를 타고, 그 수정에 모든 광고와 부킹 일정을 다 바꾸기도 하고 때로는 아예 개봉을 미뤄버리는 이런 세계. 무조건 일정을 맞추기 위해 밤을 새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게 일상이던 삶을 살다가 온 나는 한참을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자유분방함 외에도 나를 당황 시킨 것은 바로 ‘퇴근 시간 이후의 업무’였다. 퇴근 후에 전화가 울리고 끝없이 야근하고, 주말 출근하는 삶이 싫어서 퇴사한 나였는데, 간과한게 있었다. ‘영화는 퇴근 후에, 주말에 보는 것’이라는 점. 즉, ‘영화 마케팅을 하는 나’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시간’에 일을 해야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영화의 성수기는 ‘여름 휴가 시즌’ ‘명절 시즌’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 이었다.



1년이 시작되면 그 해의 연휴를 살피고, 대략적인 개봉 기간을 잡는다. 그리고 개봉이 잡히면 평일 저녁, 주말, 연휴 기간에 시사를 열고, GV*를 잡고 무대인사를 잡는다. 밤12시가 땡 하면 예매율과 스코어를 체크하고, 그에 맞춰 다음 전략을 준비한다. 저녁 6시 이후 업무가 훨씬 중요하고, 주말을 더 눈여겨 봐야하는 그런 세계로 나는 이직을 한 것이다.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절망적이었다. 왜 다들 퇴근 이후에 영화보고 주말에 영화 보는 거야? 내 휴가는? 내 주말은? 내 퇴근 이후의 시간은...???



다행히 모든 영화가 성수기에 개봉하지는 않았고, 영화가 개봉하지 않는 시기에는 극한의 여유로움도 느낄 수 있었다. 바쁘지 않은 시기에 사무실에서 원작 만화책을 쌓아놓고 당당하게 보는 내 모습은 다른 업계 친구들의 많은 부러움을 샀다. 업무시간에 영화를 보고 만화책을 보는 날들과, 퇴근 이후 행사, 주말출근 시사와 무대인사 들이 당연한 날들이 롤러코스터처럼 반복되는, 그런 회사생활의 시작이었다.



*GV : Guest Visit의 약자. 영화 상영 후 감독이나 배우, 평론가들이 관객들과 함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말한다. 예술영화만 할 것 같지만 감독이 유명하거나 배우가 유명할 경우 티켓 판매와 홍보 활동을 위해 상업영화도 꽤 많이 하는 마케팅 활동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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