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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열 Aug 22. 2022

무명의 대한민국 엔지니어

대한민국이 독자 개발한 누리호가 한 번의 발사 실패를 겪고 2차 발사 시기에 성공을 거뒀습니다. 생중계로 진행된 발사 이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당당하게 보도자료를 냈고 이종호 장관은 공식적으로 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발표 전부터 웃는 얼굴로 등장한 이 장관의 모습에 국민들은 진작 성공을 눈치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발표와 함께 과기부가 ‘대한민국 우주 시대 개막’이란 제목으로 올린 보도자료에는 이종호 과기부 장관과 이상률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근데 정작 고생하고 누리호를 만든 엔지니어들의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장관과 원장이 이번 프로젝트를 대표하는 건 맞는데 실제로 일한 엔지니어들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은겁니다.

그들이 이름을 올린 기사는 누리호 발사가 성공하고 일주일이 지난 뒤였습니다. 항우연 노동조합은 “다른 공공연구기관과 비교해도 한참 낮은 임금 수준이고 시간외수당을 법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성명을 냈습니다. 정치인들이 연구원들을 사천·고흥으로 내몰고 정부 부처와 기관은 연구자 처우를 ‘나 몰라라’ 하고 있다고 분노를 터뜨리기도 했죠. 이렇게 엔지니어들은 기사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전 세계 7번째로 위성을 자력 발사할 정도로 기술력을 가진 엔지니어들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걸 보면 대한민국에서 엔지니어라는 명칭이 붙으면 분야에 상관없이 무시당하나 싶습니다. 이런 홀대는 토목, 건설 엔지니어링 분야에서는 당연하고 익숙한 일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사농공상 신분제도가 2022년 대한민국에서도 아직 남아있는 건가 싶습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던 터키의 차나칼레 대교 개통 기사에서도 시공사인 SK에코플랜트와 DL이앤씨는 언급되지만 설계를 맡은 평화엔지니어링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만 그런게 아니라 그전부터 항상 그래왔습니다. 고속도로든, 공항이든, 터널이든 무슨 준공식, 완공식 할 것 없이 엔지니어링사와 엔지니어의 노고가 언급되는 곳은 없었습니다. 업계 전문지나 관련 단체에서나 몇 번 다룬 게 전부입니다.

  

고속도로 표지석에서도 발주처나 시공사는 빠지지 않고 적혀있는데 설계사는 없는 것도 많습니다. 공사 기간은 발주날짜부터 적혀있는데, 정작 사전타당성조사부터 설계까지 가장 먼저 일한 엔지니어링사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사 현장에 적혀있는 상황판에서도 마찬가지일 때가 많습니다. 이 정도면 엔지니어는 이름을 숨겨야만 하는 직업인가 싶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이름을 숨기는 직업은 몇 개 없습니다. 불법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정체가 들키면 안되는 국정원 요원들이 대표적인 예죠. 엔지니어링사가 국정원 요원들처럼 국가 기밀을 다루는 것도 아닐텐데, 그럼 불법적인 일을 하는건가 봅니다. 아니면 그냥 이 나라의 엔지니어 대우가 딱 그 정도 수준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시에 있는 히스토릭 컬럼비아 리버 하이웨이(Historic Columbia River Highway)에는 도로를 설계한 엔지니어 사무엘 랭커스터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 앞 현판에는 ‘엔지니어 사무엘 랭커스터의 천재성 덕분에 수 백만명의 사람들이 신이 만든 광경을 즐길 수 있게 됐다’는 문구가 적혀있기도 합니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엔지니어의 역할과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겁니다. 우리나라였으면 기념관이 생기더라도 발주처랑 시공사 이름만 박혀있을 겁니다. 기념비적인 공사였다면 대통령이나 장관 이름까지는 있겠죠.


이런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미국에서는 엔지니어 대우가 확실합니다. 지난해 연말 나사의 제임스웹 우주 망원경 발사 당시 생중계됐던 장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사를 성공하고 난 뒤 관제실에서 환호하고 자축하는 엔지니어들의 모습은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 그 자체였습니다. 엔지니어를 한 명 한 명을 화면에 담아가며 누가 이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었는지 확인해줬습니다.


미국이 오랜 시간 전 세계 선진국을 리드하는 위치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이렇게 국가 발전 최전선에 있는 엔지니어를 대우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자타공인 선진국 반열에 올랐는데, 이 정도 대우는 해줘도 되지 않나 싶습니다. 엔지니어의 천재성보다 충성심을 요구하는 대한민국에서 엔지니어 이름 석 자 올리는 건 좀 무리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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