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목줄에 묶인 새끼 고양이

내가 널 만난 게 운명이겠지?

by 준익

체감 온도 35도 이상 육박하는 폭염이었다.

탈수가 된 빨래를 들고 이런 더위엔 1시간 내로 바짝 마르겠다 생각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바람 한 점 없는 텁텁한 공기가 유연제에서 나는 장미 향을 더 짙게 내뱉었다.

멀리 녹음은 짙었고 텃밭 채소들은 싱그러웠다.

평화로운 아침이다.

얼른 널고 내려가 각 얼음을 가득 채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시원하게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손놀림이 가빠졌다.

조용한 평화로움도 잠시 어디선가 찢어질 듯한 소리에 민소매 입은 팔에 소름이 돋았다.

하던 동작을 멈추고 지붕들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골목 라인 중간쯤에서 작은 생물체가 바둥거리는 것이 보였다.

“뭐?”




종렬로 단독집들이 마주 보고 자동차 한 대 들어올 정도의 골목길 끝에서 두 번째가 우리 집이다.

집 앞은 동네 어르신들의 텃밭이 있어 자주 길고양이들을 마주하곤 한다.

식빵 자세로 쉬기도 하고, 잠도 자고, 먹지도 않을 풀도 뜯기도 했다.

내 촉으론 길 고양이지 싶다.

그것도 아주 작은 새끼 고양이.

눈을 찌푸리며 자세히 보니 뭔가 팅팅 당기는 모양이기도 하고 괴로운 듯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별 일 아닌 일이 아니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는 집사로써 저건 필시 지나가는 그냥 길 냥이의 모습은 아닌지라 흥분되었기 때문이다.

빨래를 허겁지겁 줄도 세우지 못한 채 아무렇게나 널어놓고 슬리퍼 신은 맨발로 급히 시멘트 계단을 내려가다 두서너 층을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이쿠! 아야!”


안 그래도 허리가 좋지 않은데 계단 모서리에 주저앉으니 눈앞이 번쩍했다.

지금 엉덩이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 허술하게 입은 옷이 문제여서 꼬리뼈를 만지며 엉거주춤 집안으로 들어갔다.


왕래 없던 골목 안쪽 집 할머니는 야채와 대파를 다듬고 계셨다.

우수관 기둥에 노끈으로 연결한 개 목줄을 맨 새끼 고양이가 나를 보더니 서럽게 울어댔다.

“어머니! 이 고양이 어머니가 키우는 고양인가요?”

다듬던 일을 멈추지 않고 나를 한번 쓱 보더니

“신경 쓰지 말고 가요!”

퉁명스럽고 까칠한 눈으로 흘겨보더니 다시 야채를 다듬으셨다.

“길고양이는 아닌 것 같고 키우는 고양이를 왜 목줄 해 놓으셨어요?”

“새댁이 데리고 가요. 똥 싸고 오줌 싸고 미치겠어.”

말문이 막혔다.

그럼 태어난 생명이 똥 싸고 오줌 싸지 인형처럼 가만히 있을까?

“어머니, 이렇게 어린 고양이 목줄을 왜 매셨어요. 그리고 키우는 고양이는 이렇게 밖에 매어 놓으면 안 돼요.”

나도 질세라 단호하게 말했더니

“아는 사람한테 이틀 전에 데꼬 왔는데 도로 가지고 가라 했어. 지금 주인 올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그럼 왜 나보고 데리고 가라고 하셨을까.


묶어놓은 우수관 옆에 에어컨 물을 받는 물통이 있어서 새끼 고양이가 물통을 타고 물속으로도 자꾸 빠지곤 했다.

“그럼 주인이 올 때까지 방에다 풀어놓아요. 사료도 없고 물도 없는데 목줄마저 매어 놓으면 어떡해요. 여긴 산책하는 개도 있고 길고양이도 많은데.”

자꾸 옆에서 귀찮게 하니 목줄을 홱 풀어다 본인 집 대문 손잡이에 다시 묶어 놓았다.

대문 밑부분은 아기 머리통만 한 구멍이 뚫려 녹슬어 있었고 은색 철밥그릇에 에어컨 물을 퍼다가 고양이 앞에 놓더니 집안으로 들어갔다.

기가 찼다.

무슨 마음으로 저 어린 애기를 데려와서 이틀 만에 백기를 들었는지 화가 났다.

일단은 주인이 찾으러 올 거니 더 이상 간섭할 문제도 아니고 해서 집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목줄을 맨 고양이가 악을 쓰며 나에게 안기려 했다.

아슬아슬 목을 죄는 짧은 노끈이 바둥바둥 매달리려는 작은 목에서 팽팽하게 조여졌다.

다가오면 뒤로 튕기고 다가오면 옥죄어 오는 노란 노끈이 교수대 위 사형수처럼 잔인해 보였다.

인정머리 없고 책임감 없는 어른이라는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 저주를 퍼부으며 집으로 가서 사료와 츄르를 그릇에 부었다.

그사이 목줄 안으로 앞발을 뺐는지 이제는 어깨와 겨드랑이 사이에서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아이고, 어떻게 사람들이 이래? 왜 데리고 왔을까 진짜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양이 주인은 문 안에서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비쩍 말라 목이 쉬어 울어도 누구 한 사람 왜 그러냐 묻지 않았다.

오히려 병 옮는다고 만지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허겁지겁 츄르를 햩아먹고 물을 날름날름

한 그릇을 비웠다.

이 더위에 사료는커녕 물조차 안 주고 자신은 먹을 야채를 다듬고 있으니 사람인가 싶었다.

돌아서면 매달리고 슬프게 우는 모습에

한 시간마다 물과 간식을 가지고 와서 옆을 지켰다.

그릉그릉 소리를 내고 내 발에 꾹꾹이를 하며

처음 본 내게 안겨드는 아이는 집고양이를 키우고 마당 냥이에게 밥을 준 시간이 6년인데도 처음이었다.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더 이상 고양이를 늘리지 않기로 결심을 했었고 그래서 길 가다 아픈 고양이를 만나게 될 까봐 외출도 잘하지 않았다.

고양이털 알레르기로 약을 먹어도, 새벽에 우다다 하는 행동 때문에 남편 출근에 지장을 줄까 각방을 써도, 고양이 별로 떠나는 마당 냥이 때문에 우울증이 생겨 문득문득 우는 나 자신이 싫어도 끝까지 키울 수 있었던 건 그 아이들이 내 손으로 왔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난 그들의 의견에 존중하고 싫어하는 이유를

가감 없이 이해한다.

나도 죽도록 싫어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을 데리고 왔을 땐 책임을 져야 한다.

누군가는 김혜자 선생님의 봉사를 왜 한국이 아닌 아프리카에서 하냐고 의아해한다.

도움이 필요한 약한 존재들을 그곳에서 처음 봤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외면하고 싶지 않고 싶을 것이다.

나는 고양이를 싫어했다.

내 관심 밖이었고 동물을 키우겠다는 계획조차 하지 않았다.

몸이 아파 죽어 가는 새끼 고양이가 아들의 손에 의해 집으로 왔을 때 그때 내 도움이 필요한 약한 존재를 처음 봤기 때문에 싫고 좋음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6년째 가족이 되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목줄 맸던 고양이는 밤 11시가 되어도 그 자리 그대로 대문 안에 있었다.

열대야에 에어컨 실외기는 팡팡 돌아가고

먼지 앉은 물그릇 옆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플래시 불빛에 눈을 찡그렸다.

“애기야! 이리 나와 봐.”

녹슨 대문 구멍으로 그 아이가 내 손으로 안기러 나왔다.

바짝 들어 올리니 종잇장만큼 가벼운 아이가 몸부림을 쳤다.

노끈은 풀려있지만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의미였다.

뽀송한 방에서 시원한 냉기를 쏘일 때 느닷없이 밖으로 내쳐진 어린 생명은 더러운 흙바닥에 몸을 누이고 무서운 외부 공격으로 두려움에 떨어도 신경 쓰이지 않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자 이제 그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면 나는 돌아서 집으로 갈 거야.

집으로 가는 길에 네가 나를 따라온다면 넌 우리 집에 있는 형과 누나와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야.

나는 내 갈 길을 갔다.

한 발짝, 두 발짝, 그리고 뒤돌아 보았다.

작고 꼬리 끝이 꺾인 회색 고등어가 내 발을 맞춰 쫄래쫄래 따라왔다.

잊었던 엉치뼈가 그때서야 욱신해지고 내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세상엔 절대라는 말은 없는 거야.

세 마리면 어때.

아팠던 기억 다 잊고 우리 새로운 가족이 되어 또 다른 삶을 시작해 보자.

네 운명은 누군가가 말하더라.

죽을 고비를 넘겨 분에 넘치는 운을 가진 행운의 러키(루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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