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존엄을 가꾸는 일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가수 이효리가 이상순과 함께 나무 의자를 만들던 때 일이다. 이상순이 남들에게 잘 보이지도 않는 나무 의자 밑바닥 부분을 열심히 사포질을 하는 것을 본 이효리가 상순에게 여긴 사람들이 안 보잖아, 이렇게 하는지 누가 알겠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상순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알잖아."
효리는 이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는 없다. 나 자신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은 보지 않더라도 나는 나를 본다. 택배 기사가 짐을 들고 이동할 때 잠시 문을 열어 주는 것, 길을 묻는 낯선 이에게 잠시 친절을 건네는 것, 누군가를 위해 잠시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 이런 순간은 나 자신에게 기특한 순간이 된다. 내가 나 자신에게 기특하게 보이는 순간이 많을수록 자존감은 올라간다.
이상순의 행동처럼 평소엔 하찮은 나도 가끔 괜찮아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대견한 순간은 굉장히 작은 것들이다.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는 것, 쓰레기를 몰래 버리지 않는 것, 어리숙한 아르바이트생의 실수에 소소한 말을 건네는 것, 플라스틱 줄이기 운동에 동참하는 것, 뒷사람을 위해 출입문을 열어주는 것, 청소하시는 분들에게 인사하는 것,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 길거리의 쓰레기를 주워 휴지통에 넣는 것, 길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를 받아주는 것, 길을 묻는 질문에 친절히 안내하는 것 등등의 사소한 것들이 바로 예다.
나도 그런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 스스로를 칭찬해주지 않았던 깨알 같은 장면들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그런 순간에 스스로 자신을 토닥여주는 건 어떨까? 남들이 보고 있지 않을 때조차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런 삶의 장면들이 쌓여 자존감이 올라간다.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진다.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의 존엄을 가꾸는 일이 결코 거창할 필요가 없다. 존엄이라는 말의 무게 때문에 창씨개명에 맞서고 인권운동에 삶을 바치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존엄은 남들이 보지 않더라도, 일상 속 하찮은 순간들이라도 정갈하게 가꾸는 일이다. 남이 생각하는 나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생각하는 나다. 남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생각 말고 나 스스로 내가 괜찮다고 느끼는 순간을 조금 더 만들어 가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