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부터 정부 대출 규제 완화, 긴급 재난 지원금 지원 대상.’
보이스 피싱을 당했다.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 내게 일어났다. 보이스 피싱을 다룬 영화를 보며 이런 사기를 당하는 멍청이가 어디 있냐며 했는데 내가 그런 멍청이가 되었다.
시작은 문자였다. 재난 지원금이란 문자가 내 눈에 띄었다. 1588로 시작하는 숫자는 의심을 가렸다.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굵직한 목소리의 남자가 전활 받았다. 신용 조회를 위해 주민 번호를 입력하라고 해서 입력했다. 문자 메시지로 인증 번호 하나가 갈 건데 번호를 알려 달라했다. 심사가 완료되기까진 10여분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전화를 끊고 기다리면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다.
10분쯤 뒤 전화가 걸려왔다. 대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가웠고 기뻤다. 대출이 실행되면 제일 먼저 무엇부터 살지 머릿속은 상상을 시작했다. 일단 카메라부터 바꿔야지, 무슨 카메라로 할까 부푼 꿈을 꾸는 내게 상담원은 이렇게 얘기했다.
대출이 실행될 순 있는데 거래 실적이 부족하다고. 그래서 실적을 쌓기 위해 부득이 입/출금 거래를 몇 차례 실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무 의심 없이 알겠다 답하고 방법을 물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내 명의의 통장에 돈을 보낼 테니 지정된 계좌로 다시 돈을 보내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것이었다. 1초의 망설임 없이 그리 하겠다 답했다.
10분 뒤 회사 월급 통장 계좌로 2천만 원이 입금됐다. 카톡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고객님 안녕하세요. 상담원 000입니다. 입금된 2천 만 원을 xxx-xxxx-xxxx 계좌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입금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해당 은행 가상 계좌였기에 상담원이 지정한 계좌로 송금했고 카톡으로 답장도 보냈다. ‘방금 입금했습니다.’ 그렇게 3차례 반복했다. 상담원은 내일 몇 번만 더하면 거래 실적이 충분해져서 대출이 가능할 거라 한다. 난 그 말에 안심했다.
다음 날 아침 9시, 출근해서 업무를 막 시작하려는데 상담원에게 다시 카톡이 왔다. 오늘도 두 차례 정도 입금이 될 건데 지정된 계좌로 송금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오전에 두 건을 모두 마무리했다. 모든 미션은 끝이 났다. 내일 대출 실행을 위해 한 번 더 연락을 하겠다고 했고 나는 알았다고 답했다.
그 뒤 연락이 끊겼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상담원에겐 연락이 오지 않았다. 3일 기다리다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는데 없는 번호라고 휴대전화가 내게 말했다. 몸에 털이 곤두섰다. 뭔가 잘못됐음을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카톡으로 메시지를 전송해도 1이란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강서 경찰서 사이버 수사대인데요, 정석헌 씨 맞으시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강서 경찰서였다. 내용인 즉, 내 명의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이용을 당했다고 접수가 되어 조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일주일 안에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진술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영화로 보던 장면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쪽팔려서 어디 가서 얘기도 못 꺼낼 일을 내가 해냈다. 헛된 욕심이 부른 화였다. 나 스스로가 무척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두려움은 이상한 상상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직장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동료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는 순간을 상상했다. 부모님께 보이스 피싱 범죄 연루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이 그려졌다. 상상하면 할수록 상상은 무한 증식을 반복했다.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두렵기 시작했다.
전화받은 다음날 강서 경찰서에 자진 출석했다. 출석해서 가장 먼저 물은 건, 혹시 이 사실이 우편으로 보내지느냐였다. 범죄를 저지른 죄책감보다 나 자신의 안위를 더 걱정했다. 나로 인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돈보다 내 신변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진술서를 작성했다. 사건의 경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적었다. 증거 자료로 휴대폰 메시지를 전부 캡처해서 제출했다. 적고 보니 A4지 3장 반 분량이었다. 작성이 끝나자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지를 물었다. 경찰관은 법원에서 출두 명령이 갈 거라고 했다. 귀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등기 우편이 배달되면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아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숨고 싶을 따름이었다.
등기 우편, 등기 우편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민하느라 일은 뒷전으로 밀렸다. 2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해방 일지>의 염미정처럼 주소를 이전해 우편물을 다른 곳에서 받거나 우체부에게 연락해 우체국에서 직접 우편을 수령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신한 은행 급여 계좌가 동결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신한 은행에 찾아가 물었더니 대포 통장으로 지정되어 인출이 정지되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 통장으로 앞으로 거래는 할 수 없다는 설명과 함께. 통장에 있는 2백만 원의 돈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당장 이번 달 월급은 다른 통장으로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월급 이체를 통장을 변경하고 싶다고 대표님께 말씀드렸더니 무슨 일이냐 물으셨다. 난 별일 없다고 그냥 넘겼다. 대표님은 그 뒤에도 집요하게 계속 같은 질문을 던졌다. 무슨 사고 친 거 아니냐는 둥. 대표님의 감은 날카로웠다.
‘오늘 등기 우편 도착 예정.’ 우체국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난 우체국 배송 기사님께 전화를 걸어 거짓말을 했다. 하루 종일 외출할 예정이고 집에 아무도 없을 테니 우체국으로 직접 찾아가 우편물을 찾겠다 했다.
출근 전에 가양 우체국으로 가서 우편물을 인수했다. 우편물을 뜯는 오른손이 덜덜 떨렸다. 발신자는 남부 지방 법원이었다. 봉투를 뜯어보니 종이가 2장 들어있었다.
우편물 글이 읽히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 연신 담배를 3대 정도 피우고서야 다시 우편물을 찬찬히 살폈다. 제일 하단에 이런 메시지가 있었다. ‘무혐의’
우편물을 들고 당당히 신한은행에 찾아가 동결 계좌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거절당했다. 동결 계좌를 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답변이었다. 방법이 없냐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신한은행과 금융 거래를 하고 싶으면 새로 통장을 개설하는 게 유일하다고 했다. 그러면 동결 계좌 안에 있는 내 돈 2백만 원은 어찌 되냐고 따졌다. 찾을 수 없단다. 그런 법이 세상에 어딨냐고 얼굴을 붉히며 직원을 추궁했다. 금융법상 대포 통장으로 이용된 계좌의 경우는 그렇게 처리가 된다 했다. 납득할 수 없었지만 법은 그렇다고 했다.
헛된 욕심이 부른 화였다. 무지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40년간 돈 관리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벌이었다. ‘무혐의’로 법원에선 판결이 났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는 피해를 당했다. 난 남의 피해는 전혀 생각지 않고 내 피해만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용서를 비는 일이 다였다.
거의 1년 가까이 보이스 피싱이 나를 따라다녔다. 이런 일은 또 벌어질지 모른다. 몰라서 당하는 이런 오류는 더 이상 없어야 함을 몸소 깨달았다. 삶을 안전하게 살기 위한 공부가 무엇보다 필요함을 보이스 피싱 사건으로 알았다.
금융 무지를 해결하고자 ‘돈’ 공부를 시작했다.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몰라 인터넷 서점에서 책 3권부터 주문했다. 하루아침에 다 알 수가 없단 걸 알기에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알고자 노력했다. 생소한 용어들은 검색했고 유튜브도 찾아보기도 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매일 돈을 공부하는 중이다. 하면 할수록 재밌는 게 돈 공부란 걸 새삼 깨닫는 중이다.
보이스 피싱의 유혹은 도처에 널려 있다. 문자로 카톡으로 매일 범죄가 배달된다. 인터넷 전화로 대출 전화는 계속 온다. 보이스 피싱 범죄는 나날이 지능 높게 우리를 유혹한다. 우편물 유인 문자, 단톡방 참여 유도 문자, 결재 오류 유인 문자, 친지 사칭 카톡 등.
이제 더는 보이스 피싱 범죄에 속지 않게 되었지만 예전에 나는 그렇지 않았다. 좀 더 일찍 공부했다면 이런 피해를 당하지 않았을까. 글세 잘 모르겠다.
꺼내기 싫은 기억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벌써 5년 전 일이다. 태어나 처음 겪은 보이스 피싱은 삶에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덕분에 많은 걸 느끼고 깨달았다. 이제는 쓸데없는 욕심은 버리고 내 형편에 맞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