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퇴직 선고 25일차의 기록
나는 희망퇴직 대상자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자면 회사가 내가 퇴직하길 희망한다.
지금으로부터 25일 전, 회사 대회의실.
그 곳에서 나는 내가 속한 본부원들 전체와 실시간으로 '희망퇴직 선고'를 받았다.
퇴직 대상은 본부 전체. 그야말로 우리 본부가 그냥 폭파된다는 소식이었다.
담당하던 프로젝트들이 하나 둘 마무리 되어, 나는 이제 정말 일이 없어졌다. 본부가 통째로 없어지는 마당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도 없어 그저 눈치껏 외부 관계자들에 에둘러서 커뮤니케이션만 해둘 뿐이다.
이게 뭐 자랑할 일이라고 외부에 터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선고 받은 날로부터 2주 뒤에는 인사팀 차장과 1:1 면담을 했다.
면담 장소는 인사팀 바로 옆에 위치한 '고충처리실'.
고충을 처리해주는 곳인지, 고충이 생겨나는 곳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곳에서 비자발적 '희망퇴직 면담'을 했다. 인사팀 차장은 마치 고객센터 상담원 같았다. 고객에게 매뉴얼대로 제대로 읊어주지 않으면 마치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희망퇴직의 수순을 애써 친절하게 읊어주었다. 희망퇴직은 00일까지 신청할 수 있고, 00일이 지나가면 희망퇴직은 물 건너갈 것이며(물론 이렇게 말하진 않았다) 그 다음날에 바로 전원 대기발령 상태가 될 것이라는 것. 순순히 너가 희망퇴직을 신청한다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 도와줄 것이다(물론 이렇게도 말하진 않았다) 등등. 내가 왜 희망퇴직을 해야하고, 그럼 우리 본부가 없어진 그 자리엔 어떤 조직이 생겨날 계획이 있으며, 만약 내가 희망퇴직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에겐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등의 내가 진짜로 궁금했던 내용들은 결국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첫번째 희망퇴직 상담은 종료되었다.
면담을 할 때만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급하지 않았다.
작년 한 해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이 성공적이었고, 본부 내에서의 평가도 나름 좋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없던 자신감도 슬며시 베겨있었던 것 같다.
아니, 우리 조직 없앤다고 무서워할 줄 알어?!
내가 어디 갈 데가 없겠어? 흥.
에라이~ 뭐 버티면 어떻게든 되겠지.
따위의 생각들이었다. "희퇴 동료들"과 만나기만 하면 조직장에 대한 불만과 이번 사태에 대한 회의, 퇴직 진행 방식에 대한 분노 등에 대해 떠들었고 진짜 속마음은 알 수 없는 공중에 떠도는 이야기만 잔뜩 해댔다. "누구는 면담에서 이런 얘길 들었다더라" "경기가 이렇게 안좋은데 대체 누가 나가겠냐", ...
그리고 그렇게 하릴없이 한 주가 지나갔다.
선고 3주차가 되자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타 부서 동료와 선배들, 퇴사한 전 동료 등등. "어떡하냐" "회사가 정말 너무하다" "이건 너무 말도 안된다" 등의 따스하지만 다소 과격한 위로들을 해주었다. 격하게 공감해주며 애써 연락해준 그들에게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그게 위로가 되진 않았다.
냉정하게 생각하고, 지금이라도 사방팔방 적극적으로 자리를 알아봐야한다는 타 계열사 팀장님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살짝 겁이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1월에 설이 있으니 설이 지나면 나는 곧 대기발령 신세일텐데, 이대로만 있으면 진짜 뭐가 될 것 같았다. "대기발령"이란 네 글자가 조용하고 묵직하게 다가왔다. 꼭 복도 정수기 옆에 책상 하나 두고 노트북도 받지 못한 채, 그저 나가주면 박수쳐줄 것 같은, 그런 회사의 짐짝이 될 것 같았다. 동료들과 떠들던 카더라통신도 이젠 지겨워졌고, 다 의미 없어보였다. 이 곳에서 가만히 저런 얘기만 듣고 있는 시간이 부질 없이 느껴졌다.
고맙게도 자율좌석제를 하고 있던 덕에, 눈치 보지 않고 이곳 저곳 구석을 옮겨다니며 틈틈이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업데이트했다. 생전 처음 노션 포트폴리오도 만들었다. 원티드, 링크드인, 리멤버, 잡코리아 등 취업사이트에 들어가 상태를 업데이트하고 경력을 수정했다.
'상태 메시지: 적극 이직 중'.
3-4군데의 회사에 이력서를 냈다. (이 와중에) 가고 싶었던 곳들로 심사숙고해서 지원했다.
원티드로 입사 지원을 하면 인사담당자가 이력서를 언제 열람했는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푸시로 친절하게 매번 알려준다. 빠르게 이력서를 열람했던 2군데의 회사에서 서류가 불합격했다는 푸시가 총알처럼 왔다. 내가 한창 관심있던 분야의 회사에선 거의 하루만에 서류가 탈락했다. 예상치 못하게 초스피드로 받은 불합격 통보에 아찔해졌다.
아 이거 진짜 정신 똑바로 안차리면 뭐 되겠는데?
영문 이력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크몽이나 단기알바로 번역 서비스를 신청할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와 귀차니즘의 영향으로 그냥 내가 직접 하기로 했다. 일단 부딪쳐보는 식이었다. 이력서에 이어 영문 포트폴리오도 만들었다. 그리고 곧장 유명 글로벌 기업에 지원했다. 반나절 머리 싸매고 번역해놨는데, 이럴 때 아니고 내가 언제 이 회사에 지원이라도 해보겠는가? 못 먹어도 고!
그리고 선고 4주차인 오늘, 회사는 여전히 큰 변화가 없다. 아니 신물나리만큼 조용하다.
아직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구성원들은 그래도 실무하느라 잠시 바쁘기라도 한데, 나에게 요즘 회사는 거의 묵언수행 수준이다. 그래서 미뤄뒀던 책을 읽고 가끔 이렇게 글을 써둔다. 나의 소중한 희망퇴직 첫 경험인데 인생에서 이 시절이 뜻 깊게 남을 수 있도록 기록이라도 잘 해두려 한다. 호호.
오늘은 선고 25일이 지나는 날이고, 나는 여전히 하는 일이 없다.
그리고 희퇴 신청일까지 이제 딱 2주가 남았다.
(대문 이미지는 랜선 멍뭉이로 유명한 '재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