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서랍 속 절대반지

나의 브랜드 스토리 #3. 몰스킨(Moleskin)

by 겨울가지

초등학생때부터 일기 쓰는 것을 좋아했고,

중고등학생 시절엔 플래너에 촘촘히 공부 스케줄 짜는 것도 좋아했다. 뭔가 손으로 끄적이는 것을 좋아해왔다. 그래서 플래너와 다이어리는 거의 생필품 수준이었고, 그런 내가 성인이 되고나서 달라진 점 중 하나는 다이어리 구매에 신중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해마다 그때그때 마음에 드는 제품을 사다보니 모아놓고 보면 참 중구난방이었다.

어떤 제품은 1년 동안 쓰면서 맘에 쏙 들어 다시 구입하려고 하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면 또 다른 디자인을 사게되고, 그렇게 매년 다른 크기와 다른 디자인의 다이어리가 쌓여만 갔다. 서로 다른 디자인을 갖고 있는 것도 재미있긴 하지만, 다이어리만큼은 통일성있게 쭈욱 나열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겨났다. 추후 나만의 컬렉션을 만들어놔도 보기 좋을 만큼의 통일성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망하지 않을 회사통일성 있는 디자인의 다이어리를 찾기 시작했고,

그 답은 생각보다 쉽게 몰스킨(Moleskin)이었다.


몰스킨은 과거 2세기 전 프랑스 파리의 작은 문구점에서 판매하던 작은 노트북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 빈센트 반고흐,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의 아티스들이 사랑하던 제품이라고 한다. 이 무명의 노트북은 이후 1997년 'Moleskin'이라는 브랜드가 되어 '이야기를 담아내고 창조해가는' 가치를 계승하고 있다. 현재도 꾸준히 젊은 작가와 아티스트들을 후원하고 있으며 매년 다양한 아티스트 및 브랜드와의 콜라보 제품을 출시하고 있는데, 이 또한 일관된 브랜딩의 차원일 거라 생각한다.

2023 '프리다 칼로' 리미티드 에디션
2023 '앨리스 인 원더랜드' 리미티드 에디션
2023 'Angel Chen' 아티스트 콜라보 에디션
2023 '까웨' 콜라보 리미티드 에디션


현재는 콜라보 디자인이 정말 많이 다양해졌지만,

아주 솔직하자면, 15년 전만 하더라도 콜라보 에디션은 내게 뭔가 조잡해보였다 (취존해주세요..)

내겐 심플하고 컬러 임팩트 강한 기본 디자인이 더 몰스킨답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갖게 된 나의 첫 몰스킨은 빨간색 양장본의 데일리 버전.

데일리 하드커버 제품 가격은 39,000원인데, 스무살 대학생이던 내겐 꽤 큰 돈이었고, 다이어리에 그 돈을 쓰는 것 자체로도 큰 투자였다. 그래도 다이어리는 1년 내내 쓰는 데다 앞으로 10년, 20년 계속 보관할 것을 생각하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몰스킨의 심플한 디자인은 질릴 틈을 주지 않았고, 무엇보다 속지 퀄리티가 다른 다이어리들과 차원이 달랐다. 보드랍고 탄탄한 듯한 재질의 종이는 두꺼운 편이 아니라 잉크펜이라도 쓰는 날엔 뒷장까지 번져버리곤 했지만, 그럼에도 펜의 종류를 막론하고 써지는 감촉이 정말 부드럽고 쫀쫀했다. 뒷장에 번져버리는 것쯤이야 좀 더 신경쓰고 아껴 쓰면 됐다. 아 이게 브랜드 제품이구나! 하는 탄성을 자아내던 첫 기록의 순간.


그렇게 나는 15년동안 몰스킨과의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수납력과 나의 게으름을 핑계삼아 다양한 크기를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데일리 양장본으로 돌아왔다.

데일리에는 한 해의 날짜들이 촘촘히 박혀있어 그 날엔 무조건 뭐라도 적어야하는 의무감도 생기고, 작지 않은 사이즈와 적당한 무게감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쉽게 눈에 띄었다. 다이어리는 존재감이 좀 있어야 쉽게 잊혀지지 않고 무언의 압박을 줄 수 있기에.. ㅎㅎ


12월만 되면 나는 새해를 준비하는 기분으로 몰스킨 다이어리를 구매해뒀다.

그러던 어느 겨울, 스타벅스 매장 한 켠에 놓인 증정용 다이어리가 눈에 띄었다.

익숙한 크기에 익숙한 종이질감.. 디자인은 뭔가 가미된 느낌이었지만 어딘가 낯익은 기분이었다.

자세히 뒤적여보니 역시 몰스킨이었다! 와, 스타벅스에서 몰스킨 다이어리가 나와?!


회사에서 어차피 매일 마실 커피, 12월 한 달간 스벅에서 열심히 마시면 39,000원이 세이브되는 셈이었다. (커피값은 눈감아..) 스타벅스 커피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젠 12월만 되면 스벅 매장을 뻔질나게 드나든다. 주변에 쿨하고 상냥하고 다이어리따위 관심없는 고마운 나의 동료 분들께 e-프리퀀시를 열심히 동냥하며...! 순전히 나의 몰스킨을 겟하기 위해!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다이어리지만,

매년 12월에 다이어리를 준비하는 것이 나에겐 새해를 맞이하는 일종의 의식인 셈이다.


스타벅스 덕분에(?) 내 돈 주고 몰스킨을 구매하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언젠가 몰스킨과 스벅과의 제휴가 끝나게 된다면 난 다시 빨간색 데일리 하드 버전을 구매하겠지.


이토록 다이어리에 집착하는 이유는 다이어리에만큼은 솔직해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쁘게 다듬어진 말이나, 멋드러진 단어를 쓰지 않고도 솔직한 내 마음을 내 멋대로 휘갈긴다.

몰스킨에게만큼은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아주아주 깊은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 거다. 그만큼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선 안되는 절대반지같은 존재. 나의 몰스킨.


Every Moleskin notebook
is a book yet to be written
and a story waiting to be t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