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The last night
<8>
"I'd like to book a flight ticket to Vancouver."
밴쿠버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사려고 하는데요..
내일은 내 출국 날이었고, 이에 맞춰서 Paul은 비행기를 예약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침대 안에서 그가 비행기를 예약하는 통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말투의 그였다. 여행사 직원에게도 예의 반듯하고 에너지틱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그런 말투가 좋았다. 비행기표를 예약한 그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고, 우리는 배가 고파질 때까지 침대에서 이야기했다. 우리 둘 다 오랜만에 편안한 침대에서 취한 숙면이었기에 나름의 피로도 풀린 듯했다.
좀 더 자겠다는 그를 두고, 은행이 문 닫기 전에 카드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어 은행에 다녀오겠다고 나섰다. 돌아가는 길, 와플을 두 개 사서 올라가 방금 잠에서 깬 그와 함께 감탄하며 먹었다. 돌이켜보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와플이었는데도, 그는 연신 맛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뿌듯하리만치.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그는 말했다.
"We are on vacation, and this is not our routine. So we might be really different from our normal lives, right? I want to know what kind of person you are in your normal life. Like you are a morning person or a night person like that."
우리는 지금 휴가 중이고, 이건 우리 평소 생활이 아니잖아. 그래서 우리의 원래 모습과도 다르고... 난 네가 원래 어떤 모습인지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해. 아침형 인간인지 저녁형 인간인지 같은..
나 역시 그랬다. 여행지에서는 모든 게 다 좋아 보이고, 우리 둘 다 감정적으로 고조되어 있을 수 있음에 백 퍼센트 동의했다. 그리고 원래 그의 모습이 궁금했고, 원래 나를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원래의 나, 원래의 그를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지 그리고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지만, 막연하게 이건 여행지가 주는 환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 다 여행자이기 때문에 여행지의 설렘 따위의 것 때문에 더 쉽게 서로에게 빠져들었을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는 원래의 우리, 우리의 normal life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그런 대화를 이끌어내는 소질이 있었다. 그의 얼굴과 팔을 쓰다듬고 껴안고 있던 나에게
"You are a good toucher.."
너의 스킨십이 좋아.
라고 말하던 그가 물었다.
"Gary Chapman said there are 5 love languages. There are 5 ways to express and experience love as he said in the book. No.1 is Gift. No.2 is Quality time. and No.3 is Words of affirmation. No.4 is Acts of service. and No.5 is Physical touch. Which one is yours as you think?"
게리 채프먼은 사랑의 언어에 5가지가 있대. 그의 책에서 보면, 사랑을 표현하는 5가지 방법을 얘기하는데, 1번은 선물. 2번은 함께하는 시간을 내는 것. 3번은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말. 4번은 봉사. 5번은 스킨십이래. 너의 사랑의 언어는 뭐인 거 같아?
"I think mine is No.5, and you?"
5번인 거 같은데? 넌?
"Yes, I also think yours is No.5 and mine might be No.3. I always express what I think and what I feel."
맞아.. 내 생각에도 5번이 너의 사랑의 언어인 거 같아. 나는 3번인 거 같은데? 난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계속해서 표현하는 거 같아
그랬다. 그는 감정 표현에 세심했다. 반면에 나는 굉장히 단순한 감정 표현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와 좋다라고 표현한다면, 그는 어떻게 좋은지 디테일한 면까지 신경 쓰는 스타일이었다. 모든 면이 굉장히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우리는 다른 점 또한 많았다.
나는 조용한 곳을 좋아했고, 그는 시끄럽고 활기찬 곳을 좋아했다.
나는 미국 서부의 평화로움을 좋아했고, 그는 동부의 시끌벅적함을 좋아했다.
나는 감성적이고 느린 노래를 좋아했고, 그는 신나고 빠른 비트의 곡을 좋아했다.
나는 헤어진 남자친구와 친구로 지낼 수 없는 스타일이었고,
그는 헤어진 여자친구와도 친구로 지낼 수 있는 타입이었다.
그렇게 하염없는 대화를 하며 길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우리는 서점에 들렀다. 대만에서 파는 한국어 학습 책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서점에서 그 책을 찾아 펴는 순간, 우리 눈에 들어온 페이지에 예시로 세 단어가 쓰여 있었다.
한국
캐나다
호텔
"This is crazy.."
이게 뭐야 대박
"Oh my god. What's this"
대박 이게 뭐야
다른 점이 많은 우리여도 도돌이표였다. 이런 영화 같은 우연이 우리가 함께 있는 동안 계속해서 일어났기에 나는 이게 인연인 건가 하는 생각을 수십 번은 더 했던 것 같다. 이 서점에서의 에피소드는 그중 제일 큰 개연성이었다. 가벼운 일이었지만, 큰 임팩트였다.
그리고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그와 함께 나선 첫날 들렀던 절에서 막대를 들고 빌었던 나의 소원은
'이 남자와 꽤 오래 같이 있고 싶어요.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면,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였다. 지독히 현실적이지만 극도로 감정적인 이 남자에게 그렇게 그때부터 나는 내내 호감이었다. 그렇게 우리 상황을 담아내고 있는 그 세 단어를 책에서 발견하고 그가 느꼈던 감정은 뭐였을까.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기에 너무 많았던 이 며칠을 그는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그 날 저녁 카페에서 그가 말했다.
"So.. last night.."
마지막 밤이네..
"Last night?"
어젯밤?
"Oh I mean.. this is last night.."
아.. 오늘이 마지막 밤이라고..
항상 상황을 극적으로 만드는 그였다. 우리의 또 다른 점이었다. 나는 상황이 진지해지고, 슬퍼지는 게 싫은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대화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진지하게 만든다고 나는 푸념했고, 그는 자기가 그런 주제를 꺼내지 않으면 나는 말하지 않는다며 마치 할 수 없이 자기가 최후에 그 이야기를 꺼낸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I don't know what to say.."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Me neither.."
나도.
그는 또다시 그렇게 말했다. 비행기를 놓칠 줄 모르고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스타벅스에서 그렇게 말했듯.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나는 역시 또 '무슨 말을 꼭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이런 분위기로 만들지 말자' 고 그에게 말했다. 화제를 돌리며 그는 물었다.
"So, you said you always let your boyfriend not to do something. Then is there anything that you want me not to do?"
맞다, 너 남자친구들한테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이 항상 있댔잖아.. 그럼 나한테도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고 싶은 게 있어?
"I want you not to smile to any girls..!!"
다른 여자 보고 웃지 마...
둘 다 웃음이 터졌다.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다른 여자를 보고 웃지 말라 했다. 모든 여자가 그렇듯 그 남자가 나한테만 웃어주길 바랬다. 천성이 모두에게 나이스 한 그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슬픈 듯 안 슬픈 듯, 진지한 듯 아무렇지 않은 듯한 분위기가 계속됐고, 마주 보고 앉아 있던 그가 내 옆으로 와 앉았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마지막이라는 게 실감이 났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날 밤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또다시 새벽 늦게까지 수많은 주제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가장 친한 친구, 첫사랑, 하늘나라로 간 내 친한 동생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그가 보았던 교통사고 등등. 우리에게 남겨진 짧은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자 했고, 더 많이 물어보고자 했다.
그날 밤 결국 나는 감기에 걸렸다. 수면 부족이 큰 이유가 아니었다 싶었다. 또 오늘 저녁에 콘수프를 먹겠다고 음식점을 몇 군데 찾아다니고, 대만에서 유명한 밀크티를 사겠다고 계속 돌아다닌 것도 한 이유였던 것 같았다. 콘수프와 밀크티 둘 다 못 찾고 실패했지만.
마침 Paul도 대만으로 오기 전 홍콩에서 목감기에 걸렸기에 감기약을 산 게 있다며 나에게 먹여주었다. 아쉬웠지만 우린 잠이 들었고, 그래 봤자 여전히 늦은 새벽 2시였다.
그렇게, 오늘은, 우리의 마지막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