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시간의 퍼즐
<7>
아침 8시쯤 되었을까, 눈이 저절로 떠졌다. 새벽 6시에 잠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때 잠이 저절로 깬 건, 무의식적으로 아마도 그가 공항으로 가기 전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서둘러 씻고 메시지를 보냈다.
“Are you with Peter now?”
너 피터랑 지금 같이 있어?
Peter는 Paul과 함께 온 커플 중 신랑의 이름이었다. Paul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라는 Peter는 진중하고 세심한 간호사 친구였다. 캐나다에서도 남자 간호사는 흔한 케이스가 아니었는데, Paul은 Peter의 세심한 성향이 간호사로서 큰 장점인 거 같다고 했다. 그리고 진중하고 감정을 중시하는 그의 성격을 좋아한다 했다.
Paul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곳에서 Paul의 핸드폰은 메시지를 받을 수 없는 상태이기에 아마도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곳에서 Peter를 만나고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와이파이가 터질 때 연락을 하겠지. 하다못해 공항에서는 와이파이가 될 테니까. 하면서 모닝커피를 사러 스타벅스로 향했다.
우리 호스텔은 7층이었기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멍하니 내려갔다. 1층에 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그쪽도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엔 Paul, Peter, 그리고 Peter의 와이프 Angel이 캐리어 하나를 옆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더 당황한 쪽은 당연히 나였다. 캐리어를 들고 온 Peter와 Angel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그 둘도 어제 낮에 지우펀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제 지우펀에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인지 나는 살짝 당황했다.
잠깐의 대화를 했고, 내게 어디 가는 길이었냐고 묻는 Paul에게 스타벅스를 가는 중이었다고 하자 그는 비행기 시간까지는 꽤 남아있으니 나와 동행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Peter 커플은 아침을 먹으러 떠났고, 나와 Paul은 스타벅스에서 마지막 몇 시간을 보내러 갔다. 잠시 후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었기에 그도 나도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잡고 있던 손의 온기가 아쉽고, 애틋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러 왔고,창 밖은 쨍쨍한 아침이었다. 마치 어제저녁의 연장인 듯 우리 둘만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I don’t know what to say..”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는 이렇게 말했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빛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 또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시간이 항상 정말 빨리 갔는데, 공교롭게도 이 날은 더욱 그랬다. 짙은 아쉬움에 나는 공항까지 그를 배웅해주겠다고 제안했다.
“But is it okay for you as you have to come back by yourself?”
근데, 그러면 너 혼자 돌아와야 되잖아.. 괜찮아?
“If you were me, you wouldn’t have gone to the airport with me?”
네가 내 상황이었으면, 넌 공항까지 같이 안 가 줬을 거 같아?
그는 짐짓 잠깐 생각해보더니 자기였어도 그랬으리라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공항까지 그와 함께 가기로 했다.
현대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나 또한 핸드폰 시간을 습관적으로 확인하곤 하는데, 아무 의미 없이 켜 본 핸드폰 액정의 시간은 벌써 10시 30분이었다. 우리는 둘 다 당황했다. 1시 30분 비행기이기에 보통 10시 반에는 공항으로 출발해야 안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둘러 커피숍을 나왔고,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타기 위해 부랴부랴 움직였다. 다음 리무진 시간은 11시 30분이었고, 1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머리를 굴려 재빨리 시간 계산을 했다. 공항에 도착하면 12시 30분. 비행기 출발 1시간 전이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버스가 조금 늦게 왔지만, 그래도 빨리 달리면 제시간에 간당간당하게 도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버스 안에서 또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왜인지 그다지 초조하지는 않았다.
Paul은 나에게 비행기를 놓칠 것 같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감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가 20분 전까지 수속 가능한 것을 본 기억이 나서 국제선도 40분 전 정도까지는 가능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해 빠른 걸음으로 체크인 카운터를 찾았고, 그가 체크인하고 오기를 기다렸다. 몇 분 후 나에게로 온 그에게 물었다.
“What did they say?”
직원들이 뭐래?
“They said.. I’m too late to check-in.
The check-in counter has closed 5 mins ago."
나 늦었대.. 5분 전에 체크인 카운터 문 닫았대..
"No kidding."
장난치지 마.
우리는 둘 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를 놓치다니. 또 한 번 시트콤 같은 우연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웃겼고, 웃겼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우리 둘 다 한 번도 비행기를 놓쳐본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우리는 2층에 올라가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다 1분에 한 번씩 그냥 소리 내 웃었다.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고 그냥 시트콤 같은 상황이었기에. 스타벅스에서 커피 마시면서 수다 떨다가 비행기를 놓쳤다니...
"When you gonna go back?"
넌 언제 돌아가지?
"In 2 days.."
이틀 후에 가..
그는 그럼 하루를 우선 더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작별 인사를 하러 같이 온 공항에서, 다시 함께 타이페이로 돌아가게 된 우리. 그렇게 우리의 시간 퍼즐은 다시 또 맞춰졌다. 그는 공항에서 시내에서 묵을 호텔을 다시 예약했고, 돌아가는 버스에서 장난처럼 이야기했다.
"So would you like to have dinner with me tonight?"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
장난스런 데이트 신청이었지만, 왜인지 더 로맨틱했다. 모든 게 현실같지 않은, 영화같은 일들이었다. 우리는 몇 시간만에 그렇게 다시 타이페이로 돌아왔고, 우리가 묵었던 호스텔 근처 호텔을 예약한 그는 나에게 물었다.
"Would you mind bringing your baggage to this hotel?"
너 짐들 가지고 호텔로 오면 어때?
"I don't think that's a good idea."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나는 결국 필요한 짐 몇 개를 챙겨 그와 함께 했다. 1초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던 우리였다. 대충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어쩌다 보니 오늘도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은 채였다. 어딜 가서 뭘 먹을까 이야기하다 내가 말했다. 그냥 발길 가는 대로, 하고 싶어 지는 걸 하고 먹고 싶은 걸 먹고 가고 싶은 데를 가자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듯이. 뭔가에 쫓겨서 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로컬같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하루를 그렇게 지내기로 했다.
"I've never looked at each other this much.."
나 서로 이렇게 얼굴을 많이 쳐다보고 있었던 적이 없는 것 같아..
역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렇게 많이 그의 얼굴만 보고 있었고, 입 맞췄고, 온기를 느꼈다. 우리는 저녁 늦게까지 길거리를 그냥 돌아다녔다. 그는 음악이 나오면 춤을 췄고,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웃었고, 그는 또다시 그런 나를 보고 웃었다. 몇 시간 못 자 피곤했지만, 그 피곤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웃었다. 그렇게 돌아와 우리가 둘 다 좋아하는 영화였던 노팅힐을 보다가 그를 옆에 둔 채로 잠이 들었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떨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그의 팔에 꼭 붙어 잠이 드는 기분이 오래도록 기억이 날 정도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