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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The F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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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Eun Feb 14. 2016

The Flight_6

<6> 수많은 처음

<6>        


 터널 끝에 다다르자 우리는 다시 되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이리로 쭉 나가야 하나 생각했다. 음식점의 뒷 정원이었기에 배고파서 마땅한 음식점을 찾던 우리에게 적당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그리 큰 고민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 터널을 들어오면서부터 흘렀던 둘 간의 묘한 감정과 분위기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는 이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내 눈을 쳐다봤다. 내가 좋아하는 류의 미소였다. 느끼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았고,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지금도 그 미소가 생생히 기억나는 걸 보면, 내 표정도 분명 그랬으리라. 그 미소와 함께 허리를 감는 그의 손길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다기보다는, 좋았다.


"What are you doing? Is it okay for us?"

뭐하는 거야? 우리 이래도 돼?


웃는 눈을 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I don't know.. It's raining now..

and we're on top of the mountain.. we're in a tunnel..

and nobody's here.. I'm just.. What am I saying? "

나도 몰라.. 지금 비가 오고.. 우리는 산 꼭대기에 있고..

터널 안에 있고.. 아무도 없고.. 나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언제나 나를 떨리게 하는 말재주를 가진 그였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는 말을 줄줄 늘어놓으며 나 지금 무슨  말하는 거니라며 웃는 그가 좋았다. 오히려 준비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번지르르한 말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그에게 빠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우리 둘만 존재하는 느낌을 주는 터널이었다.


"Can you feel my heartbeat?"

내 심장 뛰는 거 느껴져?


하며 그는 나의 손을 그의 왼쪽 가슴에 대 주었다.

내 심장도 함께 뛰었다.


"I think I will remember this moment for long time.."

나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거 같아.


그는 그렇게 여자의 심리를 잘 아는, 아니 내가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하는, 그래서 더더욱 내 심장을 뛰게 하는 남자였다. 우리 둘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렇게 몇 분을 서 있었다. 허리에 감긴 그의 손길이 좋았고, 나의 양 쪽 눈을 번갈아 쳐다보며 미소를 띠고 있는 그의 얼굴과 시선이 좋았다. 내 눈에서도 역시 감정이 쏟아지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와 입 맞추는 그를 밀어낼 이유가 없었다.


 여행지에서 처음 보는 외국 사람과의 입맞춤이라니, 한 번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생각을 할 겨를도, 의지도 없었고, 그렇게 그와의 첫 키스는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몇 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음식점에서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쏟아져 나왔고, 우리는 당황하며 길을 비켜 주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만' 당황했던 것 같다.


 캐나다 문화에서 자란 그는 확실히 아시아 문화권의 나보다는 개방적이고, 남들의 시선을 덜 신경 썼다.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누가 쳐다보든 신경 쓰지 않고 춤을 췄고 나는 항상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우리도 그 터널을 빠져나왔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타이페이 시내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는 그 시간까지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밖에는 계속해서 비가 내렸고, 지우펀의 홍등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그와의 대화에만 온 신경이 닿아있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는 지난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가 전 여자친구와 어떻게 만났는지, 왜 헤어졌는지가 자세히 궁금했고, 그 또한 그랬다. 이건 이유를 알 수 없는 나의 특이한 습관 중의 하나인데, 언제나 남자친구가 생기면 그의 그 전 연애가 궁금했다.


 어떤 사람을 어떻게 만나 어떻게 연애를 했는지, 그리고 왜 헤어졌는지가 항상 궁금했기에 언제나 그 이야기를 물었다. 거기에 더해 그들 또한 내 전 연애 이야기를 궁금해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야기해주곤 했다. 하지만 남자친구들은 그런 나를 특이하게 생각했다. 헤어질 때, 다음 남자 친구에게는 전 애인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는 남자도 있었다.  버스에서 손을 잡고 타이페이 시내로 돌아가며 그런 이야기들을 묻는 내게 Paul이 물었다.


"Do you really want to know that kind of story?

Girls do not want to hear those stories as I know, right?"

너 진짜 그런 얘기가 알고 싶어?

여자들 그런 얘기 듣기 싫어하지 않아?


"Yes, I do. Is it strange?

I'm just curious how you loved and who you loved.

If you don't want to tell me you don't have to."

응. 이상해? 난 그냥 네가 어떤 사랑을 했고,

어떤 사람을 좋아했는지가 궁금해.

얘기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내가 상관없고, 그 이야기가 듣고 싶으면 자기도 상관없다며 모니카와의 연애 스토리, 그리고 그 전 여자친구들과의 이야기들도 들으며 한 시간여를 달렸다. 그 시간 내내 그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봐줬고, 잡고 있던 손길은 따뜻했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고 숙소 근처에 도착하자 이미 12시가 다 되었다.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을 사 먹으면서 그가 작게 말했다.


"Why did we meet today.. on the last day of my vacation?"

왜 우리는 오늘 만난 거야.. 내 여행 마지막 날에..


그랬다, 잊고 있었는데, 오늘이 그의 마지막 날이구나. 그는 내일 아침에 공항으로 떠나는구나. 이상한 느낌이었다. 슬픔과 아쉬움과 먹먹함이 한 데 섞인. 내일 잘 가라는 인사를 하자 그는 더 이야기하다 자자며, 씻고 자기 방에서 더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아쉬움이 들던 찰나, 씻고 다시 그의 방에서 만나 우리는 새벽 6시까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전 남자친구들에게 그랬듯 그의 핸드폰에 든 전 여자친구의 사진을 모조리 지워주고, 남자 친구도 아닌, 그렇다고 친구도 아닌 이 남자와 밤을 지새웠다.


 오후 1시 30분 비행기를 타야 했던 그는 아침 8시 반쯤 잠깐 함께 여행 온 그 결혼한 커플을 만난다고 했다. 그들은 홍콩에서 결혼식을 하며 입었던 웨딩드레스와 턱시도 등등을 Paul 편에 캐나다로 미리 보내고자 캐리어 하나를 들고 우리 호스텔로 온다고 했다. 잘 만나고, 공항으로 잘 가라고, 그리고 페이스북 메신저로 연락하자고. 나는 일찍 일어나면 연락하겠노라, 공항으로 떠나기 전 인사를 할 수 있으면 하자라고 하고 내 방으로 건너가 잠을 청했다.


 너무나 많은 처음이 있었던, 하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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