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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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훌쩍 시간이 꽤 지났고, 마침내 비는 그쳐 있었다. 어디를 가려고 하는지 폴이 물었지만, 여전히 나는 무계획이었다. 잠깐 고민 아닌 고민을 하다가, 고궁박물관을 가겠다고 결정했고, 그는 나와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타이페이에 도착해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돌아다녔다. 외로움에 사무쳤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 함께 있으니 더 좋았던 거 같다. 대화하는 게 재밌고, 그래서 느낌이 좋은 그와 함께였기에 더욱 그랬으리라.
지하철을 타고 국립 타이완 박물관의 위치를 검색하다 알게 된 사실은 '월요일 휴관' 이었다. 대부분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그렇듯 이 곳도 월요일 휴관이었다. 미리미리 알아보지 않은, 준비되지 않은 여행자의 최후였다. 이것 또한 즐거웠다. 여행지가 주는 여유로움이 아니었다 싶다. 서울이었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짜증 나는 상황이었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급히 어디를 갈까 검색했다. 그마저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으면 인터넷이 안 되는 폴의 핸드폰과 데이터가 그리 많지 않은 내 핸드폰에 의지해 찾아야 했다. 결국 우리가 찾아낸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용산사였다. 여행지다운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었고, 여행객들과 현지인들이 빽빽이 들어 있었다. 나도 그도 불교 신자가 아니었기에 향이나 초를 어떻게 쓰는 건지 몰랐다. 절을 한 바퀴 돌다 보니 이 곳 저 곳에 막대 향이 꽂혀 있었고, 사람들은 그걸 들고 기도를 하고 절을 하고 있었다. 곁눈질로 배운 방법으로 우리는 입구 근처에 꽂혀 있는 막대를 각자 하나씩 뽑아 들고,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다시 꽂아 놓았다. 그 소원이 빌어지리라 믿으면서.
하지만 나오면서 알게 된 것은, 입장할 때 막대를 사서 그걸 가지고 절 한 바퀴를 돌며 기도하고, 나올 때 그걸 꽂아놓고 나오면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 시스템을 모르고, 우리는 남들이 꽂아놓은 막대를 뽑아 거기에 우리의 기도를 올렸다. 몰랐으니까, 신도 이해해 주시겠지 하면서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이 역시도, 즐거웠다.
배도 조금 출출해지고, 길가에서 타코야끼를 사 먹으며 무작정 걸었다 우리는.
어디 가고 싶냐는 질문에
"I have no idea.."
뭐 먹고 싶냐는 질문에
"I don't have any idea.."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올까라는 질문에
"I don't know.."
우리가 가장 많이 말한 말이었다. "잘 모르겠어.."
나는 원래가 까다롭지 않은 성격이다. 특별히 하고 싶거나 절대 하기 싫은 일이 없는 스타일의. 어릴 때는 호불호가 강했지만, 그게 자랑이 아니라는 걸 안 이후부터는, 웬만하면 다 좋다고 하는 편이 되었고, 더더욱이 그곳에서는 아는 것이 정말로 없어서 계속해서 "잘 모르겠어.."라는 말을 하게 됐다.
폴 또한 그랬다. 우리는 정말 잘 몰랐으므로... 그게 정보든, 우리의 감정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정처 없이 우린 그냥 계속 걸으면서 구경을 했다. 그러다가 나는 갑자기 어제 가려고 마음먹었던 지우펀이 생각났다. 그에게 제안했고, 그는 흔쾌히 가보자 했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떠나는 그에게 편도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그곳까지 가는 것이 부담이 아닐까 물어봤지만, 그는 괜찮다고 하면서, 비행기에서 어차피 자면 된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좋았다. 조금 먼 거리의 가보고 싶었던 지우펀에 가는 동행자가 생겨 심심하지 않았고, 그는 내내 내가 선물로 산 치약을 들어줘 짐을 줄여줘 고마웠다. 그리고 든든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 그는 대뜸
"You have small hands"
너 손 되게 작다..
라며 내 손을 쳐다보면서 자기 손과 번갈아 보았다. 내 손은 객관적으로 그렇게 언급할 만큼 작은 손은 아니다.
"아니, 안 작은데?"
하고 무심코 넘겼지만, 속으로는 한국 남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멘트에 재밌었다.
'손'이 갖는 의미가 나는 컸다. 나에게는 손을 잡는다는 것이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가 되는 기준이기도 했고, 마음을 확인하는 매개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손이 큰 남자가 좋았다. 그리고 손이 따뜻한 사람이 좋았다. 항상 차가운 내 손을 따뜻한 손으로 잡아줄 때의 온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버스가 달리는 동안,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보다 곱절은 많은 양의 비였다. 우리는 혹시라도 몰라 챙긴 내 작은 우산 하나만 들고 온 상황이었기에 당황했다. 이따 내리면 어떻게 돌아다녀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비였다. 마치 우리나라의 장마철 정도의.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와서 이 비 때문에 내려서 돌아가는 게 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어떡하겠나 싶어 우리는 그냥 마음을 내려놓았다. 이 또한 서울이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지우펀에 도착하자 비는 더 세차게 내렸고, 우리는 그 작은 우산 하나에 의지해 지우펀 거리로 갔다. 팔을 잡아야 조금이라도 둘 다 비를 덜 맞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Is it okay to hold your arm like this?"
니 팔 이렇게 잡아도 돼?
하고 꼭 붙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렇게 도착한 지우펀 거리는, 생각보다 더욱 그럴싸했다.근사했고, 로맨틱했고, 몽환적이었다. 기대했던 만큼 홍등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이국적이었다.
명물이라는 땅콩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고, 여전히 그렇게 꼭 붙어 우산을 쓰고 걷다가 문득 제대로 된 밥을 하루 종일 먹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우리는 밥을 먹을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 굵은 빗줄기 속을 잠시 헤매다 동굴 식으로 된 길이 있어 그곳에서 잠시 비를 피하기로 했다. 조금 잠잠해지면 다시 이동하기로 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고, 작은 우산 탓에 다 젖은 팔의 비를 털어냈다. 그렇게 한 숨 돌리며 터널 안으로 들어가다 보니, 막상 사람들은 없었고, 어디로 통하는지도 모르겠는 터널이었다. 그 끝은 한 음식점의 뒷 정원으로 통하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