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나 또한 차 한잔에
차를 시작하게 된 기억을 떠올리다.
기억조차 희미한 차와의 첫 만남은 나뭇잎 한 장으로 자리한다. 중학시절, 스승의 날 1일 교사로 오신 학부형이 차를 소개해 주셨다. 큰 키에 포근한 인상을 지닌 분이었다. 조신함 따위는 도시락과 함께 까먹어 버린, 치마 입은 남학생 같은 여중생들의 왁자지껄한 기선제압 시도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평화와 자애를 얼굴 가득 보여주셨다.
그분은 차를 좋아하지만 가르칠 정도는 아니라 하시며, 차를 늦게 알게 된 것이 아쉽다고 하셨다. 우리가 차를 좀 더 일찍 알고, 제대로 알아 가기를 바란다며, 차를 맛 보여 주셨다. 녹차 한 잔과 다과를 주셨는데, 나뭇잎을 씻어 접시 삼아 내어 주셨다. 차가 어디에 담겨 있었는지는 희미하다. 기억하는 것은 다과가 올려진 나뭇잎, 그리고 입안을 가득 채워준 맑은 차. 그것뿐이다. 그녀는 다과를 담은 나뭇잎을 건네주었는데, 나는 계절 담긴 그녀의 마음을 받은 듯했고, 차를 받아 마신 것은 몸이었는데, 밝아진 것은 마음인 듯했다. 내가 기억하는 차는 그러했다
이 시간, 단 한 명이라도 차를 좋아하게 된다면 의미 있지 않겠냐며 상상만으로도 당신은 행복하다고 하시는데, 왠지 나 일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그 때처럼 나의 예지력이 정확한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수업 후, 인사를 하며 차에 흥미를 보이는 나에게, 그분은 내가 크면 차를 배우고 접할 환경이 더 좋아져 있을 것이라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셨다. 학창 시절 차와의 연은 그것이 전부였다. 시작이 되어준 한 잔을 끝으로, 싱그러운 초록 잎이 바삭바삭 갈색이 되도록 마음에 묻어 두었다.
그렇게 만난 차의 기억은 서른 즈음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지만, 시작하기는 쉽지 않았다. 너무 깊이 좋아할 것 을 알았던 것인지, 가볍게 즐기는 차를 넘어서는 선택에 선뜻 나서지지 않았다. 무언가 대안을 찾고 싶었던 걸까. 십 수년 먼저 태어났더라면 생산적인 일이 아니라며 눈총 받았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제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널리 향유하게 된 다양한 분야를 시도하고 경험했다.
성취감을 주고 창의력을 발휘하게 해 준 베이킹, 섬세한 직관이며 치밀한 과학이던 초콜릿, 차와 함께 자연스럽게 흥미를 갖게 된 보태니컬 아트, 식문화를 아우르고 사람과 함께하여 더욱 의미 있던 파티 스타일링 등 모두 나를 쌓아가는 시간이 되었지만 여전히 허전함이 남았다. 자꾸만 차에 마음에 가는데, 딱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커피와 와인을 먼저 배웠다. 형상이 비슷한 음료를 배우니 되려 갈증만 심해졌다. 그리하여 정말 차를 하고 싶은가 돌아보니, 그 모든 경험에 늘 함께 한 것이 차였다.
손 닿는 대로 책을 읽고 배우며 나름의 길을 찾아 차를 익히기 시작했다. 차 속에 생각보다 큰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차는 검박하지만, 사치스럽기도 하다. 유구한 역사 속 방대한 스토리는 서유기나, 반지의 제왕보다 큰 스케일을 자랑한다. 역사가 방대하니 문화 또한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더하여 힐링을 넘어 수양을 통한 성장과 성숙을 가능하게 해 준다. 차 산업과 차문화의 발전을 위해 생활음료, 기호음료의 역할을 부인할 필요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차는 수양 음료로, 크고 작은 성취를 통해 채울 수 없는 1%를, 99% 같은 1%를 채워준다. 맛과 향으로도 충분한데, 원한다면 어디로든 더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니, 알면 알수록 차를 대체할 무엇을 찾기 어렵다.
학창시절 맑은 차 한 잔이 거대한 물줄기가 되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굽이굽이 돌아온 시간들도 차 생활에 자양분이 되어주니, 너그럽게 품어주는 차가 소중할 따름이다. 가끔 “오늘 한 명이라도 차를 좋아하게 된다면 행복할 것 같다”는 그 말을 떠올린다. 그분이 차 한 잔에 기쁨을 느끼는 어느 날, 내가 보낸 행복이 담겨 있으리라. 언젠가 나 또한 차 한 잔에 그러하기를 기대하며, 오늘도 내일도 차에 열심을 더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