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사회 초년생의 티를 어느 정도 벗어나 근무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갈 때쯤 돈에 얽힌 황당했던, 하지만 그냥 넘겼다가는 큰일 날 뻔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영어유치부가 있는 대형 어학원의 유치부 선생님은 계약 기간이 끝나도 대체로 재계약률이 높은 편이다. 학원 측에서는 유치부 담임을 맡겨야 하고 초등부와 달리 유치부는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기에 최소한 일 년은 안정적으로 담임을 맡아 줄 선생님을 원하고 유치부 선생님들은 경력을 쌓기 위해 재계약을 하는 편이다.
영어유치부 담임 선생님들 역시 학원 강사로서의 경력을 쌓기 위해 근무환경이 괜찮다면 재개약을 하는 편이고 선생님이 성실하면 학원도 웬만하면 계속 일해주길 원한다. 그런데 유치부의 6세 반 중 한 반의 선생님이 학원일 그만하고 다른 쪽으로 경력을 쌓아보기 위해 퇴사를 하면서 새 학기 시작에 맞춰 새로운 선생님을 구해서 인수인계를 2주 동안 해준 후 3월 새 학기가 시작한 지 2주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원장님께서 상의할 일이 있다고 호출하셔서 원장실에 들어갔더니 망설이다가 운을 띄우셨다.
"유치부에 새로 오신 선생님이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며 월급 한 달 치를 가불해 달라는데 가능해요?"
우리 학원은 본사 직영 캠퍼스였고 내가 회계장부를 관리하고 있으니 돈 문제는 항상 나와 상의를 하고 결정하셨다.
"말도 안 되죠. 가불 안돼요. 본사에서 그걸 허락해줄 리가 없죠. 그리고 근무한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을 뭘 믿고 돈을 줘요"
"나도 그렇게 얘기했는데 사정을 하길래 혹시 2주 치 만이라도 미리 줄 수 없냐고 부탁하는데 어쩌죠?"
"안돼요. 원장님 사비로도주시면 안돼요.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정 급하면 부모님께 빌리거나 친구한테 빌리겠죠. 월급을 미리 주는 건 본사에서도 안된다고 할 거예요"
원장실에서 나오는데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원장님께 주의를 주고 나왔으니 별일 있겠나 싶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사건이 터졌다.
아침에 셔틀기사님이 유치부 아이들 태우러 출발하셔야 하는데 이 선생님이 연락도 없이 무단결근을 해서 기다리던 기사님이 급하게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유치부 선생님 기다리다가 애들 시간 맞춰 못 태울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기사님 잠시만요, 제가 다른 선생님 지금 바로 택시 태워서 보낼 테니까 혼자 출발하지 마시고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장소만 알려주세요"
다행히 2번 셔틀을 타고 등원하는 유치부 아이들 모두 수업 시간에 늦지 않고 도착했지만 담임 선생님이 출근을 안 한 6세 반은 아침부터 혼돈의 도가니였다.
그리고 전화도 안 받고 내리 일주일 동안 잠수를 탄 선생님 덕분에 부원장님이 갑자기 6세 반을 맡아서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 온 선생님이 일주일째 얼굴이 안 보이니까 셔틀 반장님이 올라오셔서 나에게 면담 요청을 하셨다.
"반장님 셔틀에 무슨 문제 생겼어요? 웬일로 갑자기 면담 요청을 하셨어요?"
"새로 오신 선생님 아픈 거예요? 왜 일주일째 출근을 안 하고 있어요?"
"잘 모르겠어요. 연락도 안되고 그만둘 거면 얘길 해줘야 우리도 빨리 새로운 선생님을 뽑던가 하는데 학기 초인데 학부모 항의에 난리도 아니네요"
"어허... 이거 큰일이네..."
"그렇죠. 큰일은 큰일이죠. 안 그래도 그일 때문에 골치가 아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 그 선생님한테 돈 빌려 줬는데..."
"네??? 돈이요? 얼마나 빌려 주셨는데요?"
"난 20 만원 빌려줬죠. 그런데 2호 기사는 10만 원,3호는 15만 원 빌려줬다는데 4호는 60만 원 빌려줬다고 하더라고요"
머리가 띵했다. 월급 가불이 안돼서 셔틀 기사님마다 돈을 다 빌려가고 잠수를 탔으니 기사님들이 기다리다 몸 달아서 점심 식사 후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얼마씩 빌려줬다는 걸 알게 되었고 셔틀 반장님이 나에게 털어놓으신 것이었다.
"아이고... 그러게 온 지 2주밖에 안된 사람을 뭘 믿고 돈을 빌려주셨어요?"
"유치부 새 담임 선생님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전혀 예상 못했죠"
셔틀 반장님과 면담이 끝난 후 원장님께 바로 이 사실을 알렸고 잠수 탄 선생님의 등본과 이력서를 찾아봤다.
그리고 이력서에 나와있던 부모의 연락처 중 먼저 엄마에게 전화를 했는데 다행히 연락이 되었다.
"걔 내놓은 자식이에요. 우리랑 같이 안 산 지 2년 넘었는데요. 우리도 연락이 안돼요. 우리는 걔 핸드폰 번호도 모르는걸요"
다른 사람도 아닌 기사님들 돈을 떼어먹고 날라서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골치가 아팠는데 본사의 대표원장님께 연락을 드려 우리 학원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했더니 원장님이 기사님들 떼인 돈은 사비로 주겠다고 하셨다. 기사님들 문제가 해결이 된 후 소식을 전달드렸더니 셔틀 반장님이 우리도 똥 밟은 샘 칠 테니 그냥 60만 원 떼인 4호차 돈만 건네주라고 하셨다.
"본사 원장님이 다 주신다고 하셨으니 그냥 받으세요. 뭐 이런 일이 다 생기는지 정말 황당하네요. 그리고 앞으로는 선생님들이 혹시라도 돈 빌려달라고 하면 꼭 저한테 먼저 이야기하세요"
평화롭게 마무리가 되고 3개월 후 오전 11시쯤 어느 날 돈 떼먹고 날랐던 그 선생님이 직접 학원에 제 발로 찾아왔다.
생각 같아서는 쌍욕을 날려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핀잔을 줬더니 죄송하다며 원장님 좀 만나고 싶다고 했다.
원장님과 1시간을 넘게 원장실에서 이야기를 한 후 나와서는 다시 사과를 하고 학원을 나갔다.
"기사님들 돈 돌려주겠다고 찾아왔네요. 자기가 지금 한꺼번에 돌려줄 여건은 안되고 매달 조금씩 갚겠다고 하는데요"
"정말 가지가지하네요. 그래도 다행히 양심의 가책은 느꼈나 보네요."
결국 돈 떼이고3개월 후에 모든 기사님들이 돈을 받으셨고 본원의 원장님은 그냥 기사님들 보너스 드린 셈 치라고 하신 후 평화롭게 마무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