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참 전 같이 일했던 한 원어민 선생님이 어느 날은 아침에 출근하면서 이게 뭔데 집에 계속 오냐고 고지서를 하나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물어봤다.
온통 한국어만 쓰여 있으니 자기에게 올게 뭐가 있겠나 싶어서 몇 달을 계속 버렸는데 같은 고지서가 계속 우편함에 꽂혀 있다가 이번 고지서는 빨간 글씨가 잔뜩 쓰여 있으니 본인도 불길한 예감에 가지고 온 것이었다.
고지서의 정체는 건강보험 요금이었고 몇 달째 미납했으니 압류 통보가 같이 우편으로 배송된 것이었다.
원어민 강사가 한국에 차도 없고 원룸의 월세는 학원에서 납부를 해 주고 있으니 압류할 것은 월급통장 밖에 없는 상황이니 계속 세금을 안내면 통장이 압류될 것이라는 통보가 온 것이었다.
고지서의 밀린 세금을 보니 금액이 후덜덜했다. 밀린 건강보험료가 몇백만 원에 달하는 금액이었는데 내가 답답해서 건강보험료를 왜 안 냈는지 물어보았다.
사연을 들어보니 딱하긴 하지만 세금을 안 내고 도망갈 수는 없는 문제이기에 네가 외국인이어도 낼 건 내야 한다고 말해주었더니 난리가 났다.
미국인인 내가 왜 한국에 세금을 내야하나며 뭔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그래서 내가 되물었다.
"그럼 미국은 세금 안 내고 일하니? 월급 받으면 세금 내는 건 미국이나 한국이나 똑같아. 아니 어떤 나라가 세금 안 내고 월급 가져가니? 그런 나라 있으면 나한테도 알려줘. 나도 거기 가서 세금 안 내고 일하게"(영어로 진행된 대화입니다. 대화의 수위도 욕설이 오가며 훨씬 높았으나 자체적으로 순화시켰으며, 욕은 빼고 편의상 반말로 썼습니다)
그래서 원장님께 도대체 왜 이 선생님이 4대 보험 가입을 안 하고 지역가입자로 건강보험 고지서가 날아왔는지 여쭤보았다.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도 대학생들이 학비 낼 돈이 부족한 경우에는 학자금 대출제도를 많이 이용한다.
문제는 대학을 졸업한 후 이 대출금을 취업을 해서 갚아야 하는데 자국에서 취업이 안되니 한국으로 온다. 이게 대부분의 영어 원어민 강사들의 현실이다.
한국은 전국의 어학원에서 항상 원어민 강사 채용 수요가 있고 이들은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한국행을 택하거나 학자금 대출이 없어도 자국에서 취업이 안 되는 경우 놀고먹을 수 없으니 아무 조건 없이 영어가 모국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고용해 주는 한국으로 오는 것이다.
그 당시 이 선생님 또한 갚아야 할 학자금이 몇천만 원 있었고 한국에서 아껴살면 월급만 일 년 모아서 돌아가면 충분히 갚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래서 학원에 부탁을 해서 4대 보험 가입을 안 하고 원천징수만 해서 월급을 더 받아 간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원장님이 4대 보험 가입을 안 하면 지역가입자로 건강보험 고지서가 나오니 매달 그 보험료를 꼭 납부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세금을 안 내고 도망갈 심산으로 매번 오는 고지서를 무시했던 것이다.
의료보험 제도는 미국과 달랐으니 이걸 단순히 미국처럼 그냥 보험 가입을 안 하고 돈을 안 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프면 참고 약국에서 파는 약으로 일 년 버티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건강보험료를 무시했다가 가산금에 납부해야 할 세금까지 몇 백만 원이 적혀있는 고지서가 본인 앞에 놓여있으니 난리가 난 것이다.
아낄게 따로 있지 모르면 물어보기라도 하던가 으이구...
원장님이 보험료 냈냐고 본인에게 직접 물어봤는데 맨날 냈다고 하니까 원장님 역시 세금을 납부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학자금 갚을 생각으로 한국에서 아껴 살다가 건강보험료 폭탄을 맞은 게 안타까워서 원장님께서 아는 변호사와 세무사에게 물어봤더니 소득이 없으면 모를까 한국에서 소득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내야 한다고 깎아줄 수도 없다고 한다.단 분할 납부는 가능하니 건강보험공단에 전화해서 분할납부 신청을 하면 해줄 거라고 해서 내가 공단에 전화까지 해서 사정을 이야기한 후 분할납부 고지서가 학원으로 배송되도록 주소도 변경해 놓았다.
결국 한꺼번에 낼 돈이 없어서 분할 납부를 했고 통장이 압류되는 처지는 피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경험이 없으면 없는 데로 대부분의 원어민 강사들은 먼저 한국생활을 경험해 본 동료들의 조언도 듣고 자기들끼리 교류도 하는데 돈 번다고 학원과 집만 왔다 갔다 하며 친구도 안 만들며 생활하다가 몇백만 원의 건강보험 고지서 폭탄을 맞은 후 한국의 매운맛을 제대로 본 케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