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트니 뮤지엄에서 앤디 워홀의 많은 작품들을 보고 나니 피츠버그에 있는 앤디 워홀 뮤지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앤디 워홀은 팬실배니아 피츠버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뉴욕으로 왔기에, 피츠버그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다리가 참 많은 도시 피츠버그에서 가장 유명한 세 개의 다리 Three sisters 중 하나가 '앤디 워홀 브리지'이다.
앤디 워홀 뮤지엄은 단일 예술가 뮤지엄으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멋지다고 알려져 있다. 뉴욕 첼시의 휘트니 뮤지엄의 멤버는 앤디 워홀 뮤지엄과 카네기 뮤지엄에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내부로 들어가면 앤디 워홀 뮤지엄 다운 분위기가 펼쳐진다.
앤디 워홀은 1928년 8월 6일, 팬실바니아 주 피츠버그의 탄광 마을에서 사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세기 말 앤드류 카네기의 철강사업을 시작으로 피츠버그는 철강사업의 중심지였고, 가난한 이민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피츠버그 광산으로 많이 몰려들었다. 워홀의 부모는 체코에서 건너온 이민자였다. 워홀은 어렸을 때부터 병치레를 자주 했고, 여덟 살부터는 류머티즘 병까지 앓아 하루 종일 누워있어야 할 적이 많았다. 그렇게 허약하고 소심했기에 친구들과 밖에서 어울려 놀기보다는 집안에서 혼자 조용히 뭔가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일한 낙이자 위안이었다.
1934년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도 그의 손에는 늘 스케치북과 연필이 들려있었는데 선생님은 워홀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차리고 카네기 뮤지엄의 토요 미술 수업을 권유했다. 스칼래스틱 아트 앤 롸이팅 대회에서도 여러 번 수상을 했던 워홀이 고교 재학 중이던 1943년 그린 [Self portrait] 그림도 좋았다. 그림 뿐 아니라 영화, 애니메이션, 사진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프로젝터와 카메라를 구해주고 집 지하에 암실까지 만들어 아들의 흥미와 관심을 살려주려고 애썼다.
고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형들은 떠돌이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고, 앤디는 그런 형들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기에 어린시절부터 미술교사를 꿈꾸었지만, 십 대 후반부터 광고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안되었지만 어머니와 형들의 격려로 집 근처의 카네기 공대 Carnegie Tech 에 입학을 한다. 1945년 고교 졸업 앨범의 사진도 크게 확대해서 전시되어있다. 대학 시절 피츠버그 백화점에 파트타임 일자리를 얻으면서, 책임자로부터 뉴욕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1949년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으로 갈 생각을 굳혔다. 그해 그린 그림 [Three Children, 1949],
공장지대인 피츠버그가 예술을 하기엔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던 그는 함께 예술가의 꿈을 키웠던 단짝 친구 필립 펄스타인 Phillip Pearlstein과 함께 뉴욕으로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고 수중에는 단돈 200불이 있었다. 뉴욕에서 워홀과 펄스타인이 둥지를 튼 곳은 음악과 문화가 살아 숨 쉬고, 그래피티의 발상지였던 이스트 빌리지의 세인트 막스 플레이스였다. 당장 생계도 막막했지만, 유명해지고 싶다는 야망과 꿈으로 조급했던 워홀은 자신의 드로잉과 포트폴리오를 들고 여러 광고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글래머] 잡지의 'Success is a job in New York'라는 에세이의 삽화를 그려 돈을 받았고, 이후 티파니, 글래머, 하퍼스 바자 등 수많은 잡지의 삽화를 그리고, 특히 구두 드로잉으로 유명세를 탔다. 미국 예술의 역사를 새로 쓴 아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의 생애를 담은 영화 [페기 구겐하임:아트 어딕트]라는 영화를 보면 페기 구겐하임과 앤디 워홀이 함께 찍은 사진이 나온다. 하지만 페기 구겐하임은 앤디 워홀의 작품을 많이 사들이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앤디 워홀은 무명 화가의 시절이 없어서 이미 작품 가격이 오를 대로 올라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느 정도 뉴욕에서 성공을 예감한 워홀은 아버지가 물려준 워홀라 Warhola라는 체코식 이름을 미국식 이름인 워홀 Warhol로 바꾸고, 생애 첫 전시회를 열게 된다. 전시회 타이틀은 자신이 숭배해 마지않던 작가 트루먼 카포티를 소재로 [앤디 워홀: 트루먼 커포티의 글에 기반을 둔 열다섯 개의 드로잉 15 Drawings based on the Writings of Truman Capote]이었다. 앤디 워홀은 카포티보다 네 살이 어린데 뉴욕으로 오기 한 해 전에 출간된 트루먼 카포티의 소설 [다른 목소리, 다른 방들 Other Voices, Other Rooms, 1948]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고, 카포티에게 수없이 엽서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뉴욕으로 와서는 카포티 집 앞을 서성이며 그를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전시회를 할 때 워홀은 카포티가 꼭 참석하길 바라며 초대장을 보냈지만 카포티는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워홀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카포티에게 호의를 갖고 접근을 했고, 결국 친해져서, 후에 카포티는 워홀이 만든 잡지 [인터뷰]의 고정 칼럼을 쓰기도 했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후 워홀은 실크스크린, 번지기 기법 등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그중 1962년부터 시도한 실크스크린 기법은 조직이 섬세한 천에 왁스나 니스를 바른 다음 인쇄를 하는 방법이다. 왜 그림을 직접 그리지 않고 실크스크린으로 하느냐는 질문에 "짧은 시간에 많은 작품을 완성해낼 수 있으니 정말 실용적이지 않나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실크스크린의 대표적인 대상은 마릴린 몬로와 재클린 케네디인데, [Jackie]는 휘트니 뮤지엄에 전시된 작품보다 더 다양한 재클린의 표정을 만날 수 있다. 재클린의 시동생 로버트 케네디도 나란히 전시되어있다.
엘리지베스 테일러 [Silver Liz, 1963], "1962월 8월 마릴린 먼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작품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라고 말한 워홀은 마릴린을 소재로 한 그림을 스물네 점이나 남겼다. [Three Marilyns, 1962]
휘트니 뮤지엄에 전시 중인 작품인데, 이곳에는 하나하나의 그림들을 따로 전시해두었다. [Myths Series, 1981],
앨비스 프레슬리, 왜 실크스크린으로 작업을 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기계가 되고 싶었다"라고도 답한 그의 말대로 1962년부터 1964년 사이에 제작된 실크스크린 작품만 해도 2,000점이 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워홀 자신의 초상화뿐 아니라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예술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을 무시하고,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 특히 예술을 일반 대중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고, 그런 워홀은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린 선구자적 예술가였다. 코카콜라와 캠벨 스프 같은 대중적인 소재를 통해 부를 가진 사람이나 일반 사람이나 같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했고, 당시 만연해있던 아메리칸드림을 구체화시키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1961년, 워홀은 뉴욕으로 와서 같이 지내던 어머니에게 캠벨 수프를 사 오게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도 수프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캠벨 수프였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돈이 많든 적든 누구나 먹는 수프가 바로 이것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예술을 일상으로 끌어들여와, 누구나 예술을 친근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워홀의 바람대로 대성공이었다.
그렇게 점점 작품 수도 늘어나고 직원들도 늘자, 워홀은 1963년 초 소방서로 사용되던 2층 벽돌 건물을 월세 150달러에 빌려 작업실로 쓰게 된다. 그러다 일 년 사이에 그곳도 공간이 부족해지자 모자를 만들던 공장의 꼭대기 층을 빌려 온통 거울 분위기가 나는 은색으로 칠하고 기둥이나 파이프 등은 은박지로 감싼 다음 '팩토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1968년에는 유니언 스퀘어 쪽으로 '팩토리'를 확장 이전했다, 1964년에는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11월에 카스텔리 화랑에서 개최한 "꽃'을 주제로 한 전시회는 모든 전시 작품이 매진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66년 카스텔리 화랑에서 열린 [은빛 구름 Silver Cloud] 전시는 또 한 번 대성공을 이루었다. 가로 121센티, 세로 91센티 크기의 대형 풍선에 수소를 가득 채워 화랑에 떠다니게 했는데, 당시 개당 50불에 판매를 했다고 한다. 'Silver Cloud'라는 룸을 따로 만들어 방문객들이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자,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했던 워홀은 어려서부터 큰 관심을 가졌던 영화로 눈을 돌린다. 첫 영화는 [잠]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상영시간이 무려 6시간이었고, 1964년 1월 17일부터 그래머시 소극장에서 상영이 되었다. 이후 제작한 [엠파이어]라는 영화는 그보다 두 시간이나 더 긴 영화였는데도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었고, 그해 그가 제작한 네 편의 영화 모두 뉴욕 영화제에 출품이 되었다. 1966년에는 [첼시의 소녀들 , The Chelsea Girls]를 제작했는데, 첼시 호텔의 다양한 투숙객을 통해 언더그라운드를 보여주려 했다. 첼시 호텔은 아일랜드 시인 딜런 토마스가 뉴욕을 방문했다 세상을 뜬 곳이고, 수많은 문학가와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하지만 외설적이고 노골적인 장면들을 많이 있어서 당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제작은 그의 인생을 힘들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1967년 제작한 [나, 남자 I, a Man]에 출연했던 발레리 솔라니스라는 여성 급진주의자는 자신이 준 대본을 돌려달라는 이유로 계속 워홀을 귀찮게 굴었는데 급기야 워홀에게 총을 겨눈다. 세 번째 총알이 워홀의 옆구리를 관통하고, 많은 장기들에 구멍을 남기고 등으로 튀어나왔고, 워홀은 장장 다섯 시간에 걸친 대수술 후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날 밤 자수를 한 솔라니스는 왜 워홀을 쏘았느냐는 형사들의 질문에 "워홀이 제 인생에 너무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에요 He had too much control over my life"라고 답했다. 그 사건이 신문 1면을 장식할 정도로 대서특필되자 워홀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의 작품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캠벨 수프 그림은 당시 생존 화가 중 가장 높은 가격인 6만 불에 거래되기도 했다.
총 7층으로 된 뮤지엄의 3층 전시실에는 워홀의 소장품들도 따로 전시가 되어있는데, 총상 후 워홀이 늘 착용하고 다녔다는 다양한 복대들, 처방전, 평생 복용했던 약들도 전시되어있다. 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동경했기에 화장도 많이 하고 다녔는데, 그 화장품들도 전시가 되어있다.
총상에서 회복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고, 1970년대 들어와서는 초상화를 주문을 받아 그리기 시작했다. 대신 모델을 두고 그린 것이 아니고 사진을 이용해 초상화를 제작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1972년 2월, 온화하고 두리뭉실 성격 좋아 보이는 마오쩌둥의 이미지를 제작해 또 한 번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워홀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소재들을 주로 했지만, 정치나 그 시대의 굵직굵직한 사건, 사고 들을 소재로 작품을 하기도 했다. 1977년 1월에 카스텔리 화랑에 전시한 [망치와 낫 Hammer and Sickle, 1976] 은 공산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고, 큰 관심을 받았다.
1975년부터는 [인터뷰]라는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고, 카포티와의 대화 Conversations with Capote"라는 코너를 만들어 카포티의 글을 기고했고, 워홀은 카포티의 초상화도 자주 그려주었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는 [앤디 워홀의 15분]이라는 방송 코너를 만들어 "누구나 15분 동안 유명해질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은 "15 Minutes of Fame"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냈다. 총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성치 않던 몸으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던 워홀은 1987년 [최후의 만찬] 전시회가 열리는 밀라노에서 돌아온 날 밤, 몸 상태가 무척 좋지 않았다. 병원으로 옮겨져 세 시간에 걸쳐 쓸개를 제거하는 수술을 했는데, 다음날 2월 22일 새벽 6시, 의료진은 워홀이 쉰아홉의 나이로 숨을 멈췄다고 발표했다. 4월에 열린 맨해튼 성 페트릭 성당 추모식에는 2천 명 이상의 추모객들이 찾았고, 그가 남긴 유언장에는 동생을 위해 큰 희생을 했던 두 형 앞으로 25만 불의 유산을 남긴다고 적혀있었다.
7층까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구경을 한 다음 내려와서 일층에 마련된 기프트샵에 들렀다. 유명한 황소 벽지로 벽장식을 해두었다.
앤디 워홀과 키스 해링. 책들도 아주 많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는데, 한숨을 돌리고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다. 해가 잘 들고 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창가에 마련된 워홀 카페에서 커피와 쿠키를 먹고 밖으로 나왔다. 바로 길 건너에 마련된 주차장의 핑크빛 간판도 워홀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뉴욕에서 쉬지 않고 여섯 시간을 꼬박 달려야 올 수 있는 곳이지만, 그 정도 수고가 전혀 아깝지 않은, 정말 멋진 뮤지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