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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트 스페이스 Jan 31. 2018

에드바르드 뭉크@뉴욕 매트 브로어


매트로폴리탄 분관 매트 브로어에서 작년 11월부터 시작된 뭉크 특별전이 다음주 2월 4일이면 끝이 난다. 에드바르드 뭉크 Edvard Munch는 화가로서 산 육십년 기간 동안 자화상을 참 많이 그렸다. 'Self scrutinies' 라 부르는 이 자화상들은 예술가로서, 사회 일원으로서의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특히 여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첫 자화상을 그렸던 1886부터 1943년에 걸쳐 그린 70여점에 달하는 자화상들 가운데 많은 작품들, 특히 미국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도 여럿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의 포스터에 사용된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 Self Portrait Between the Clock and the Bed, 1943] 은 죽기 바로 전 해에 그린 마지막 자화상이다.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 뢰텐 Loten 에서 태어났다.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년시절부터 많은 죽음을 마주했다. 그리고 다섯살 되던 해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몇 년 뒤 같은 병으로 죽은 누나, 장성해서 죽은 남동생, 정신병을 앓았던 여동생 등 가족의 영향도 컸다. 그렇듯 뭉크의 가족에게는 늘 병마와 고독과 슬픔이 드리워져있었다. 다섯 형제 중 결혼한 형제는 남동생 한 명 뿐이었지만 그 동생도 결혼 후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난다. 뭉크는 인간을 두려움으로 몰고가는 것이 질병과 정신병이라고 했으며, 그 두가지는 자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늘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고도 말했다. 뭉크는 그런 불안, 절망, 죽음, 슬픔, 공포를 작품 속에 담았고, 그림은 곧 자기자신이라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뭉크는 학교를 자주 빠졌고, 대신 아버지로부터 문학과 역사를 배웠다. 혼자 남은 시간에는 에드가 알란 포우의 괴기스러운 책들을 좋아했고 유령이이야기에 빠졌다. 당시 군의관 월급으로는 먹고 살기가 빠듯했던 아버지는 자식들을 데리고 자주 이사를 다녔고, 늘 부족하고 여유가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수학과 과학에 재능이 있었던 뭉크는 1879년 아버지의 바램대로 공대에 입학했지만,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자퇴해 Royal School of Art and Design 에 입학한다. 분노한 아버지는 지원을 끊어버렸고 뭉크의 삶은 더더욱 피폐해졌다. 1883년 상업미술전에 첫 작품들을 전시하는데,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프리츠 탈로는 뭉크의 파리 견학을 후원한다. 

스물 셋 청년 뭉크의 첫 자화상이라고 알려져있는 [Self Portrait, 1886] 에서 그의 눈빛은 나른하고 요상하다. 스물 여섯의 나이이던 1889년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 그해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가족을 책임 질 사람이 없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1892년 독일 베를린 미술협회 초청으로 작품 55점을 선보이는데 예술가들로부터 엄청난 혹평을 받고 실의에 빠지게 된다. 그해에 그린 자화상 [Self Portrait Beneath Woman's Mask, 1892], 1982-1908년은 베를린 시기로 분류된다. 



[해질 무렵의 절망 Sick Mood at Sunset:Despair, 1892] 이 작품은 뭉크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절규 The Scream, 1893]의 전작으로 뭉크는 이 작품을 일컬어 '첫번째 절규 the first Scream'이라고 했다. 뭉크는 이렇게 설명한다. 

"해가 질 무렵 두 명의 친구와 걷고 있었다. 왠지 모를 고독을 느꼈다. 갑자기 하늘은 피처럼 붉게 변했다. 멈춰섰다. 피곤했고, 난간에 기대섰다. 푸르고 어둡던 하늘에서 피처럼 불타는 구름을 보았다. 자연을 꿰뚫고 나오는 듯한 절규를 들었다. 친구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 걸었다. 나는 극도의 공포로 떨고 있었다" 

자신의 내면을 너무나도 잘 드러내는 듯한 이 작품을 뭉크는 무척 사랑했고, 1893-1910년에 걸쳐 총 네 작품으로 탄생했다. 뮤지엄에 소장되었던 작품들은 1994년과 2004년에 도난을 당하기도 했고, 단 한점만이 개인 소장이었는데 2013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19.9밀리언, 한화로 1,300억원에 가까운 금액에 낙찰되어 피카소 그림 경매 기록을 갱신했다. 뭉크는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합하면 약 50점에 달하는데 그 중 하나인 석판화 [The Scream, 1895]



사랑하던 누이 소피가 죽은 지 16년 뒤 뭉크는 소피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병실에 드리운 죽음 Death in the Sick Room, 1893] 에서는 다른 동생들과 뭉크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같은 해 [별이 빚나는 밤에 Starry Night, 1893]을 그렸다. 고흐의 작품과 같은 이름인데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뭉크는 파리에 있는 동안 폴 고갱과 반 고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같은 해에 그려진 두 작품, [폭풍우 The Storm, 1893] [달빛 Moonlight, 1893] 검은 드레스를 입은 창백한 표정의 여인, 그리고 뒤로 드리운 그림자가 죽음을 상징하는 것 같아 잊혀지지 않았다.



[생클루의 밤 Night in Saint-Cloud, 1893] 뭉크는 1890년에 파리외곽의 생클루로 이사해서 자연주의를 탈피해 프렌치 상징주의에 빠졌다. 한밤 모자를 쓰고 창가에 기대앉은 이의 고독을 느낄 수 있다. 이 시기는 뭉크가 베를린에서 꽤 명성을 날리던 시기였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부담으로 힘들어했던 시기였다. 두 손을 모으고 수줍은 듯 발가벗은 소녀의 모습 [사춘기 Puberty, 1894] 는 소녀의 모습을 통해 어른이 되어가는 시기의 불안과 두려움을 보여준다.



[담배를 든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Cigarette, 1895] 은 정장을 입은 서른 한 살의 보히메안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병든 아이 The Sick Child, 1896] 은 1885-1927 사이에 그려진 [The Sick Child' 중 하나이다.



[유전 Inheritance, 1897]는 뭉크가 파리의 한 병원에 있었던 기억이 모티브가 되었다. 대기실에서 우연히 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안고 눈물 흘리는 어머니를 보았다. 아이의 모습을 통해 매독이라고 추정하고 그 병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분명했다. [키스 The Kiss, 1897] 정열적이면서도 뭔가 쓸쓸한 남녀의 키스를 담은 이 작품은 1890년대 많이그렸던 'Frieze of Life' 의한 작품이다.  



[마돈나 Madonna, 1895-97] 생명, 사랑, 고통 그리고 죽음을 담은 뭉크의 'Frieze of Life' 의 중요한 작품이다. 뭉크는 1889-1925 사이에 이런 주제로 작품을 완성했다. '생의 프리즈' 는 뭉크가 1888년부터 1925년까지 거의 30년 가까이 매달렸던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그의 노력의 산물이다. 'Loving Woman' 이라 불리는 마돈나는 각각 조금씩 색상이 다른 다섯개 그림과 두개의 프린트로 창작되어있다.



[ 빨간 담쟁이 덩쿨 Red Virginia Creeper, 1898-1900], [Eye in Eye, 1899-90] 아담과 이브 같은 느낌의 작품이다. 



[지옥에서의 자화상 Self Portrait in Hell, 1903] 서른 아홉의 모습으로 지옥불에 갖힌 모습이다. 이듬해 그린 [솔을 든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Brushes, 1904] 전신을 드러낸 첫 자화상이다. 



[와인 병을 등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a Bottle of Wine, 1906], 독일 호텔이 배경으로 당시 그의 인생은 불안과 절망, 외로움과 고독으로 가득했고, 술이 큰 위안이 되었다. 뭉크는 생애 동안 알콜중독으로 고생을 했고, 이 그림을 그린 2년 뒤 코펜하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때 받은 전기충격 요법이 화풍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어둡고 절망스러운 자신의 인생을 술로 위로받으려는 모습은 여전했던 것 같다. 

[마랏의 죽음 The Death of Marat, 1907] 은 1902년 뭉크에게 일어났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그림을 그렸다. 1902년 연인이던 상류층 계급 툴라 라르센 Tulla Larsen 과 말다툼 끝에 손에 총을 쏜 모습이다. 1793년 프랑스혁명을 이끌던 Jean Paul Marat 이 암살당한 사건의 이름을 빌려 당시 상황의 처참함을 보여주고 있다.



[질투 Jealousy, 1907] 은 시인과 그의 아내를 그린 그림. 그의 아내는 한 때 뭉크의 연인이었는데 같은 문학써클 동료이던 시인과 결혼했다. 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렸던 그 여인은 서른 넷이 되던 해 호텔방에서 살해되었다. [발가벗은 채 우는 여인 Weeping Nude, 1913-14] 는 1911-1915년 사이 뭉크의 모델이자 가정부였던 여인을 그리고 있다. 처음 뭉크의 모델이 되었던 것은 열 일곱살이었고 이 작품은 그녀가 열 아홉살 때 그린 그림이다.



[죽음의 투쟁 Death Struggle, 1915] 는 40년 전에 죽은 여동생 소피와 소피를 둘러싼 걱정하는 모습의 가족들을 함께 담고 있다. [스패니쉬 플루를 앓는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the Spanish Flu, 1919], 50세의 자신 모습.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노르웨이 사람들이 스패니쉬 플루로 죽어나갔고, 그들을 위로하려는 그림이었고, 1919년 전시를 했다. 클림트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요절한 천재 화가 에곤 쉴레도 스패니쉬 플루로 1918년 사망했다. 실제 뭉크는 스패니쉬플루에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적혀있었다.



[기관지염에 걸린 남자 Man with Bronchitis, 1920] 는 기관지염에 걸린 자신을 그리고 있다. [잠못 드는 밤; 내면의 동요의 자화상 Sleepless Night: Self-Portrait in Inner Turmoil, 1920]



[화가와 모델 The Artist and His Model, 1919-21] 은 뭉크 자신과 모델을 그리고 있다. 옷을 차려입은 뭉크와 잠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과는 대화의 단절을 보여준다.



같은 해 같은 모델로 그린 그림으로 [등나무의자 옆의 모델 Model by the Wicker Chair, 1919-21] 이 있다. 오슬로 에켈리 Ekely, Oslo 뭉크의 집 앞에 선 외로운 여인. 역시 뭉크의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여인을 그린 [베란다 계단에서 On the Veranda Stairs, 1922-24]



[별이 빚나는 밤에 Starry Night, 1922-24] 는 1893년 '별이 빛나느 밤에' 보다는 한결 밝은 느낌이다. 오슬로 뭉크 집의 베란다에서 바라본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밤의 방랑자 The Night Wanderer, 1923-24] ,



[잿더미 Ashes, 1925]는 생명, 사랑, 고통 그리고 죽음을 담은 뭉크의 '생의 프리즈 Frieze of Life' 시리즈이다. 그 옆의 [생의 춤 The Dance of Life, 1925] 는 달빛 아래 춤을 추는 노르웨이 마을의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사랑을 담고 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Hands in Pockets, 1925-26] 옆의 작품은 스무 두 해가 지난 뒤의 그림으로 나이가 들은 모습이 확연하다. 술도 한 병이 아니라 여러병이고 작품 제목도 [별들과 함께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Bottles, 1938], 이 작품에서 뭉크는 75세 생일에 받은 와인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마치 바텐더처럼 보인다



그림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자 했던 뭉크는 유화 1,100점, 판화 18,000점, 드로잉 45,000점 등 엄청난 수의 작품을 남겼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없었던 뭉크는 작품들을 마치 자식처럼 애지중지 했기에 한 작품이 남의 손에 넘어가면 비슷한 작품을 또 그렸다고 전해진다. 팔순을 넘긴 1944년,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전 작품을 오슬로 시에 환원한다는 유언을 남겼고, 뭉크의 탄생 100주년인 1963년, 뭉크의 고향 노르웨이 오슬로에는 뭉크 박물관이 개관을 했다. 

지난 가을 전시가 시작된 이후로 매디슨 애비뉴의 매트 브루어를 지나갈 때면 으례 그곳으로 발길이 향했다. 뭉크의 작품들은 어둡고, 슬프고, 아프고, 그리고 진실이 담겨있기에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 마음이 아려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동은 더 강렬해진다. 문학가와 예술가의 의무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주는 것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화가로서의 생애 동안 늘 불안과 절망을 껴안고 살았던 고흐도 마지막 희망이었던 동생 테호에게 보낸 편지에 모파상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소설가는 사람들에게 더 큰 위안을 주기 위해 자연과 세상을 훨씬 더 아름답게 묘사할 자유가 있다" 

뭉크는 모파상과는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려했던 것 같다."사람들은 내가 자만심이나 이기심이 있어서 자화상을 많이 그린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나는 나 자신을 미화하지 않고 솔직한 나를 그린다. 불안과 혼란으로 흔들리는 이들이 내 그림을 들여다보며 위안을 받길 바란다" 라고 말했다. 뭉크는 솔직하게 자신을 그렸고, "그림은 곧 나 자신이다" 라고 했다. "문학이 솔직하다면, 문학은 작가 그 자신이다. 내 작품은 그어느 것도 나 자신이 아닌 것이 없다" 라고 말했던 테네시 윌리엄스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뭉크의 그림으로부터 감동과 위안을 받고싶은 사람들의 발길이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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