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2 키우는 엄마입니다
날씨가 좋았다. 점심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걸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에 밖에서 걷는 게 오랜만이라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직장인들을 지나쳐 학교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오랜만에 힐을 신었더니 좀 불편하고 어색했다.
알림장에 공개 수업 후 학부모 총회를 한다고 했다. 아이 반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학부모들이 사물함이 있는 교실 뒤편을 꽉 채우고 있었다. 낯선 엄마들을 쓱 한 번 둘러봤다. 아이를 사립초에 보내는 얼마 전에 학부모 총회에 다녀온 친구가 트위드 재킷에 샤넬백이 국룰인 것 같다던데 우리 반은 그렇지는 않았다. 트위드에 샤넬은 딱 한 명 있었다. 트위드에 디올이 있었고 트렌치에 샤넬도 있긴 했다. 하지만 다 그렇진 않았고 다양했다. 옷차림에 크게 신경 안 쓴 것 같은 엄마도 간혹 보였다. 그중 한 엄마가 수업 중간에 풀었던 머리를 묶는 걸 보면서 속으로 '저 엄마는 이 자리가 되게 편한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은근히 긴장됐기 때문이다. 아이가 1학년이었던 작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공개 수업과 학부모 총회를 모두 줌으로 했다. 학교에 와서 아이가 수업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총회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었다.
공개 수업은 아이들이 자기소개 발표를 하는 시간으로 진행됐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순서대로 얘기하는 거였다. 네 명씩 여섯 개의 모둠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제비 뽑기로 순서를 정하고 뽑힌 모둠의 모둠원들이 앞에 나와서 발표를 했다. 우리 아이는 1모둠이었는데 1모둠이 마지막 발표 모둠이었다.
남자아이들이 가장 되고 싶다고 한 건 축구 선수였다. 아이들이 이렇게 축구를 좋아할 줄이야.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아이도 있었고 유튜버도 두 명쯤 됐다. 여자아이들은 피아니스트, 화가, 미용사, 의사, 경찰관 등을 이야기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 발표 시간이 제일 싫었다. 가끔은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교실 밖으로 탈출한 적도 있다. 우리 아이 차례였고 나는 아이가 어떻게 발표를 할지 긴장하며 서있었다. 소심하게 작은 목소리로 겨우 종이를 읽을까? 아니면 태권도 심사 때 했던 것처럼 아주 큰 소리로 말해서 사람들에게 주목받으려고 할까?
제가 좋아하는 것은 책 읽기입니다.
제가 잘하는 것은 과학입니다. 저는 나중에 커서 과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는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발표했다. 주목받으려고 애쓰지도 그렇다고 소심하지도 않았다. 자신감이 있었다. 다행이다. 이 아이는 나와 다르다. 그런데 OO아, 너 책 읽기보다 더 좋아하는 거 있지 않니? ^^ 그거 있잖아. 유튜브 하고 게임...
공개 수업이 끝나고 아이는 바로 방과 후 수업 교실로 갔다. 아이는 엄마가 학교에 있다고 해서 엄마한테 붙어 있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내가 학교에 온 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방과 후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가 저쪽 복도로 뛰어가자 아이는 내게 인사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그 친구를 따라갔다. 그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내가 곁에 있든 없든 아이는 안정감이 있는 것이다.
학부모 총회는 교장 선생님의 환영 인사를 담은 어색한 영상으로 시작했다. 영상이 끝나고 선생님은 학사 일정이라든지 요즘 어떤 수업을 하고 있는지, 우리 반 분위기가 어떤지 등에 관해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아이들과 "좋은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고 했다. 아침에 아이들과 첫인사를 나누거나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도 "좋은 사람 되겠습니다" 한다고 했다. 정말 좋은 인사말이었다.
요즘에는 화를 다스리는 '마음 신호등' 연습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빨간불은 '멈춰요' 노란불은 '생각해요' 초록불은 '표현해요'라고 했다. 화가 났을 때는 일단 멈추고 어떻게 나의 불편한 마음을 말하는 게 좋을지 생각한 다음,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표현하는 거다. 이것도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화를 표현하지 않고 억누르는 아이에게는 화를 참으면 안 된다고 적절히 표현하라고 가르친다고 했는데 참 균형 잡히고 현명한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참 여유롭고 열린 태도로 학부모를 대하는 선생님을 보니 마음이 심히 놓였다. 선생님은 점잖은 검정 트위드 재킷에 크록스를 신고 계셨는데 그 소탈한 모습 또한 참 보기 좋았다.
교실 밖으로 나오니 학교 정원에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놀이터 계단을 내려와서 정문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목련도 피어있고 철쭉도 피어있었다. 참 안심된다. 학교도 선생님도 아이도.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학교 정문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