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솔 Sep 09. 2023

사기꾼 택시 아저씨가 한 좋은 일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 사기꾼이었어. 


연애 때였는지 결혼하고 나서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와 남편은 청계천을 따라 영풍문고 종로점에서 교보문고 광화문점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기억에서는 영풍문고와 교보문고의 거리가 엄청 멀었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가까워서 깜짝 놀랐다. 그냥 몇 걸음 걸으니 바로 교보문고였다. 


이십대 초반, 첫데이트를 한 장소가 이곳이었다. 그날 남편은 종로 3가역에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 놀러온 미국 사는 친구와 명동에서 놀다 헤어진 후 종로3가역으로 남편을 만나러 갔다. 왜 종로3가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건지 잘 모르겠다. 나와 남편 둘다 평소에 잘 안 가는 동네이기도 했고 그날 이후 종로에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 낙원상가에 볼일이 있었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바깥으로 나가는 지하철 출구 계단을 올라가는데 남편이 벨트 멘 청바지를 추켜올리며 옷매무새를 다듬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성급하게 동작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흑청 데님 스커트에 카라에 꽃 장식이 있는 분홍색 얇은 니트를 입고 끝에 크리스탈비즈가 달린 드롭 이어링을 하고 있었다. 남편도 바지를 추켜올리는 구나. 그때 남편의 행동은 살짝 깨긴 했다. 


그날 뭘 먹었는지 뭘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아 있는 기억은 바지를 추켜올리던 남편의 모습과, 늦은 저녁 둘이 종로 거리를 걷다가 영풍문고 앞에서 교보문고에 가려고 택시를 잡아 탄 일이다. 영풍문고가 휴무였는지 영업시간이 다 된건지 문이 닫혀 있었다. 낯선 동네였고 어디가 어딘지 잘 몰라서 교보문고가 삼백 미터 정도 앞에 있는지도 모르고 택시를 탔다. 그런데 우리는 꽤나 한참을 타고 나서야 교보문고 앞에 도착했다. 


그 아저씨 진짜 대박이다. 이렇게 가까운데 일부러 뺑뺑 돌았던 거잖아?


남편이 웃으며 "그러게."했다. 그런데 조금 더 걷다가 그때 택시 뒷좌석에서 나와 가까이 앉기 위해 일부러 가운데에 앉았던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뭐, 그 택시 아저씨가 좋은 일 한 걸 수도.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가로등의 주황 불빛이 쏟아져내리던 세종문화회관 광장이었다.초록색 벤치에 드문드문 몇몇 사람이 홀로 앉아 있었다. 한적하고 적막한 공기에 우리의 발소리, 말소리만 크게 들렸다. 서로 약간 떨어진 상태로 높낮이가 다른 길을 오르고 내리며 걷고 있는데 남편이 가까이 다가왔다. 


손 잡고 걸어요.


남편의 말이 귓가에 닿았다. 가슴이 쿵쾅댔고 짜릿한 전기가 몸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우리는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잡고 나서 언제 손을 빼야하나 하는 고민이 곧 들었지만 동시에 남편이 먼저 손을 뺄까봐 불안하기도 했다. 다행히 우리는 그날 헤어질 때까지 계속 손을 잡았다.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러나 기분은, 하늘 꼭대기까지 날아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체 엉덩이에 뭘 하신 거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