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포 세대 내가 가장 두려웠던 귀국 후의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다. 직업을 선택할때의 싫어하거나 잘 하지 못하는것을 리스트업 해보라는 말이 있어 생각을 해보았다.
나의 직업 디자이너,
내가 디자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미적 감각이 있기 때문이고 조용히 컴퓨터 앞에서 집중해서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안에서 내가 원하는대로 오브젝트를 놓고 늘리고 줄이고 색을 바꾸는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품
나는 웹사이트 하나하나가 모두다 하나의 빌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에게 치여 지쳐있고 몸이 말을 듣질 않는다. 실패했다는 생각도 들고 내가 잘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크몽의 작은 리뷰에 나는 상처받고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다.
유리멘탈 그래, 나 유리 멘탈인거 다시 한번 인정한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 통장의 잔고를 다시 한번 봤다. 그리고 가계부를 비교해 봤다.
스팬딩은 너무 많고 모아 놓은것은 몇달 없다.
과감하게 홍대의 포트폴리오 학원을 등록했다. 한국- 포트폴리오의 스타일도 다르고 좋은 포트폴리오라면 공개하지 않을것임을 알기에 한국 기업 전문으로 "포폴만" 도와 준다는 과정을 등록했다.
특이하다 PDF파일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것도 그렇고 "포폴만" 도와 준다는 학원들이 있다니 그말인 즉슨 멋들어진 포폴을 들고온 디자이너들의 케이스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사교육"으로 점철된 결과라는 것일까?
미술 한다는 사람들 까다로운 가운데, 나는 덜 예민하다고 판단하지만 잠자리 자동차 소리 사람많은것을 질색하기에 사실 서울갈때마다 에너지가 쭉 빠져 아얘 결단을 내려 버렸다.
차라리 상향지원하여 지방에서 원격으로 할 수 있는 직장을 찾아 안정적으로 일을 하겠다 라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포트폴리오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올라갔다.
하루에 3일 호텔 그리고 KTX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숙소를 알아봤지만 적당히 머물만한 숙소는 상당히 "꽤" 비쌌다. 원룸에 혼자 사는 친척동생의 집에 신세지기에는 이미 좁은 그 집에서 신세지기가 싫었다.
방법이 없을까? 다시 12년전의 나처럼 고시원에 다시 가려니 이미 나의 커버린 머리는 저축을 해야한다는걸 알면서도 다시 돌아가려는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못했다.
그놈의 자존심 허영심 명품이나 입고 걸치는덴 그렇게 욕심이 없으면서도 주거와 먹는거엔 너무도 아낌이 없는나, 평범한 집안의 장녀가 서울에 일도 아니고 강의를 들으러 가면서 KTX에 호텔을 잡아 간다는데
부모님은 어안이 벙벙하셨다. 안그럴리가 있나. 나 빼고 3식구 생활비보다 얹혀 사는 내가 더 많은 돈을 쓰는데 맞을리가 없었다.
이런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이렇게 브런치에 써나가는것이 맞을까 싶으면서도 다시 부의 추월선이라든가 갑자기 높아져버린 금리에도 어떻게든 자산을 불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작은 통장의 액수가 허헛하고 나에게 웃음을 줬다.
지금 만나고 있는 나의 애인은 절대 모르겠지, 미국 석사 유학에 자기 사업체까지 있었던 여자가 빈털털이라니 능력도 있고, 돈도 꽤 버니 모아 놓은것이 있을꺼라고 생각하겠지만, 미안- 없다. 그래서 결혼은 ..., 최대한 미루는걸로 ..., 슬프네 나도 그 3포 세대중에 하나인걸까?
동생을 결혼 시키면서 하루에도 몇번씩 투닥거리는걸 보니 결혼하면서도 그닥 도움을 받을 순 없을꺼 같고, 빨리 아이를 낳아 국가에 효도하고 싶건만 안타깝게도 너무 먼 이야기라는게 슬퍼졌다.
예물예단결혼식비용 나 혼자 안하고 싶으면 뭐하겠나, 미래의 남편 그리고 남편의 부모님들의 생각도 중요하니까, 나는 부모님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대로 하니까
근데 글쎄 현재 나의 애인님은 듣기론 유교보이시라 결혼식은 해야하며 어느정도 갖추고 결혼하고 싶어하는듯 했다.
작년에 내가 사는 지방 아파트 분양 하는것 청약 받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분양가 상향제니 현재 4대보험이 없이 개인사업자로 일하는 나는 DTI 니 DSR이니 하는것 때문에 대출도 어렵고,
처음 내야 하는 계약금 + 두번의 중도금 모아 놓은게 없으니 그만 두라는 가족들의 만류가 참 애석했다.
나는 세상을 너무 쉽게 보는걸까? 아니면 너무 낙관적인걸까
이 나이에 내가 너무 초라해 보여서 작년엔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는 내 동생이 이해가 안갔는데 이제 이해가 간다. 사람만나기가 싫다.
미국에선 둘이 사랑해서 결혼하면 집이든 혼수든 그닥 중요하지 않다. 부모님이 도와 주신다면 감사하겠지만 그런일은 거의 없고 둘이서 살던 살림을 합치거나(보통 독립해서 혼자 사니까) 같이 월세를 살다가 집을 사고 (한국에 비해 적은 계약금으로 작은 이율로 집을 살 수 있다. 집을 구매하는거나 월세사는것과 비슷하다)
근데 여기는 애 낳으면 도와 줄 사람이 필요하고, 잘못해서 이혼하면 변호사들이 양육권을 무조건 상대편을 주라고 한단다. 미국에선 이혼해도 양육권이 없는 사람에게 양육비를 본인의 소득대비해서 줘야하고 책임감 있게 육아에 동참하지 않으면 아얘 면접교섭권도 박탈해버린다.
그래서, 무서워서 어디 애 낳겠나, 결혼하면 반절이 이혼한다는데 그게 내 케이스가 될지 어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애가 엄마아빠 온전히 있는 가정에서 자라야 한다는 그런 편견도 아직 내 세대에 있다는것도 놀랐다.
미국에선 미혼모도 많았고, 애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하는 경우는 없었다. 둘의 합의로 하는것이지 여자가 애 때문에 어쩔수 없이 결혼하는일은 없다 어차피 미혼모로 수당을 받거나 양육비를 받고 함께 양육을 하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냥 바닥에서 부터 부딪혀 일어나도 한 가정으로 함께 일어나는 것이 가능한데 커피를 마시면서 계산한 나와 내 남자친구의 계산으로는 둘다 현금 5천은 있어야 작은 아파트라도 사서 시작할 수 있었고,
결혼준비 예물 예단은 플러스 알파인 비용이였다.
그걸 어떻게 모으지 생각했는데, 돈 버는게 한국이 더 어렵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여기는 더 경쟁이 심한데다 급여도 적다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사람들이 말하던 그 한국의 단점이 정말로 살에 닿았다.
스산했다. 외로움 없지만 내 존재감이 내 통장의 잔고에 비례하여 내가 꿈에 그리던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눈물이 살짝 났다.
벌써 35세 내년이 겨우 3달이 남았는데 이렇게 또 희망이 사그라드나 라고 생각하니 슬퍼졌다.
근 10년만에 돌아오니 삐까뻔쩍하게 굴러다니는 저 외제차들은 넘치고 넘치는데 내 통장잔고와 벌이로는 살만한 집하나 마음 놓고 아이 하나 낳고 키울 수가 없는 노릇이라니 부의 추월차선이라니 그런게 있기나 한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