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혹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얼룩진' 옷을 벗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외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정희진처럼 읽기>, 정희진
지금은 "진보"라는 개념이 보편적으로 선택 가능한, 그나마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춘 소양같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내가 가진 진보, 학생회, 운동권에 대한 이미지는 가난이었다. 30만원짜리 패딩을 입고 철거촌 투쟁에 합류한 나는...불편했다. 진보적이고 싶지만 운동권이기는 싫었다. 운동하고 싶었지만 가난하기는 싫었다.
나는 종종 학생운동, 노동운동, 종교 진영이 같은 매커니즘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학생운동은 개인의 스펙을 쌓기 위한 활동이 아니고, 노동운동은 연봉 협상을 잘하기 위함이 아니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내가 아는 한 예수님은 언제나 가난을 선택했다. 가장 남루한 옷을 입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길은 약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일보다 어렵다고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나의 새내기 시절의 갈등을 겪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을 믿고 싶지만 가난하기는 싫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