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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잇 Oct 04. 2020

나는 해리 포터를 덕질했다

나는 어렸을 때 <해리 포터>를 매우 좋아했다.


<해리 포터> 책 신간이 나올 때마다 하루라도 빨리 사달라고 안달을 내며 엄마를 졸랐고, 이미 읽은 책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해리 포터>의 세계관을 사랑했고, 마법 주문을 다 외웠으며, 해리와 그 친구들의 모험을 상상하며 그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기쁨이자 행복이었고, <해리 포터>가 영화로 출시된다는 소식에는 누구보다 기뻐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1년에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영화가 출시되었을 땐, 해리를 연기한 배우 다니엘 래드클리프에 푹 빠져 들었다. 뭐가 그리 좋았냐 묻는다면 푸른 눈동자와 순수한 미소, 영국 발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사람 좋아하는데 뭐 이유가 있을까. 


당시 또래 친구들이 H.O.T, god, 신화 등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다니엘 래드클리프를 ‘덕질'했다.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팬카페에 가입하고, 인터뷰를 돌려 보고, 사진을 모으고, 팬픽 소설까지 썼다. 나름 인기가 많던 팬픽을 연재하던 때에는 매일 조회수와 댓글을 확인하며 동기 부여가 됐고, 짜릿함과 성취감을 느끼며 글쓰기의 재미를 처음으로 배우기도 했다. 


중학생 때까지도 내 인생 목표는 한 살 차이 나는 다니엘 래드클리프와 결혼하는 거였다. 잊고 살던 그 마음을 오랜만에 기억하게 된 계기는 책장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한 팬 노트였다. 노트는 몇 년간 모은 사진들과 부치지 못한 팬레터로 빽빽했고, 절절하고 애틋한 팬심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페이지마다 가득했다. 


(좌) 팬 노트 표지의 다니엘의 머리는 세월에 날아가 버렸다. (우) 정성스레 한 줄 한 줄 오려 붙인 프로필.



언제부터 그 마음이 식기 시작했을까? 아마 사춘기와 함께 다니엘의 외모가 격변하기 시작한 <해리 포터와 불의 잔> 영화 출시쯤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 중학교 고학년에 접어들며 현실 세계에서 바빠졌던 시기가 겹쳤던 것이다. 그렇게 좋아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다니엘은 곧 내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내 인생 최초 덕질은 불이 서서히 사그라들듯이 그렇게 끝나갔다.  


지금은 다니엘이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만, 간간히 <해리 포터> 주연 배우의 근황 뉴스를 확인할 때면 옛 친구(라고 쓰고 옛사랑이라 읽는다)가 잘 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처럼 마음이 괜히 뿌듯하다.  


그렇게 대가 없이 누군가를 응원하고 바라보는 것이 참 쉽지 않은데,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참 순수했구나 싶다. 요즘은 좋은 영화를 보거나 노래를 들어도 예전처럼 덕질의 의지가 좀처럼 생겨나지 않기에, 그때의 내가 그립기도 하다. 


요즘도 가끔 <해리 포터> 시리즈를 정주행 한다. 시리즈 중 마지막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가 개봉한 지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영화의 배경음악을 들으면 가슴이 뛴다. 어린 시절 소중한 추억을 선물해 준 다니엘 래드클리프와 J.K. 롤링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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