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어는케이트쌤 Apr 28. 2021

뉴질랜드에서의 악몽 같았던 그날들

그날 이후 저는 가족들에게 매일 사랑한다고 끝없이 말합니다.

 때는 2019년 6월 경..   평화롭던 저희 집 와 차고에 난데없이 강도가 들어 차를 망가뜨리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남편과 제 차 즉 8개의 타이어 전체가 칼로 찢기는 상황이... 두 번째는 제 하얀 차에 빨간 페인트..

 그리고 세 번째는 죽은 쥐가 우체통에... 매주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상황에서 저는 호주 출장이 잡혀 있었어요.


 호주로 떠나는 오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3시에 나서는 길은 정말 무서웠습니다. 혹시라도 이 무시무시한 인간이 어딘가 숨어 있다가 칼을 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로등도 거의 없는 캄캄한 뉴질랜드 밤,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집 앞에 대 놓은 제  차로 걸어가 그  차를 타고  홀로 공항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없는 사이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공항으로 가는 발걸음 한걸음 한걸음이 모두 무거웠습니다.*매주 화요일 저녁 6-7 사이에 뭔가가 자꾸 일이 생기는데 그것들이 예상할 수가 없으니  불안감이 주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어요....이렇게 소소하게 일어나다 총이나 칼같은 것들 까지 동원되는  아닐까? 하는 막연함도 있었고요..... 특히 죽은 동물을 자꾸 우체통에 넣는 행위 자체가 너도 이렇게   있다라는 경고 처럼 느껴졌습니다.


 한 번은 인종차별 메시지가 담긴 (내 나라에서 꺼져라 라고 쓰인) 편지가 우체통에서 발견되자 저희 남편은 바로 경찰을 불렀습니다. 당시 뉴질랜드의 남섬 크라이스트 처치의 이슬람 사원에서 거의 대량학살 수준의, 총을 든 호주 남자의 인종차별 살인사건이 큰 이슈였기 때문에 '인종' 자가 들어가면 경찰도 촉각을 곤두 세웠습니다. 개 3마리를 끌고 바로 편지를 넣고 간 사람을 찾겠다며 경찰차 4대가 왔었다고 합니다. 당시 저는 회사에서 일하던 중이었고, 남편은 저희 차가 망가졌던 그날 바로 샤오미에서 카메라를 사 와서 설치를 했었기 때문에 그 카메라에 누군가가 우체통에 뭔가를 넣는 것을 봄과 동시에 경찰을 불렀습니다.


 처음부터 경찰이 적극적이 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 경찰을 찾았을 때는 그저 고등학생들 장난이라고 했습니다. 저희 부부가 hate crime이라고 강조를 해도 전혀 들어주지 않았었죠.


 인종차별 이슈가 생기자 더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하더니, 이 편지를 계기로 뉴질랜드 헤럴드에서 크게 기사화시켜주고 나니 수사에 더욱 힘써주었습니다.


 아무런 힘이 없는 외국인을 신경 써줄 리가 없었던 것이죠. 그나마 회사에 이민자 출신의 동료들이 많아 남의 일 같지 않다며 주변 지인 중 헤럴드 기자인 사람을 불러다 주어 뉴스에 싣게 해 주었고, 그 기사를 보고 정부에서도 또는 한인단체에서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주고자 했습니다.


 그 뉴스가 나가기 전까진 제가 직접 경찰서로  찾아가 여러 번 사정했었습니다. 매주 같은 날짜에 일어나고 있으니 그 날 순찰을 더 돌아달라.. 아이들을 신경 쓰는 나라라서 저희 아이들의 나이까지 들먹이며 부탁을 하고 오곤 했었는데 기사가 나가면서 저도 어디서 용기가 낫는지 총리인 자신다 아덴에게 이메일을 쓰게 되었습니다.


 제 이메일 및 헤럴드 기자의 뉴스가 나가자 제가 살던 동네의 커뮤니티 센터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도와줄 일이 없겠느냐고... 다 좋은 소식만 온 것은 아닙니다. 어떤 중국계 뉴질랜드 정치인은 저희 이야기를 자신의 홍보에 이용하려는 속셈으로 찾아왔었습니다.


 당시 헤럴드 기자들은 제가 인터뷰 한 부분을 토시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내보내 주었습니다. 클릭 수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저희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 주며 오프라인 신문에서는 두 번째 장 전체  페이지에 도배를 해주었습니다.

https://www.nzherald.co.nz/nz/dead-animals-in-mailbox-slashed-tyres-and-death-threats-aucklan d-family-told-to-leave-nz/LKPZEERN47FUW4RG4XXCV6FCBQ/


 물론 인구수가 적은 나라다 보니 사건 사고가 한국만큼 없어서도 그럴 수 있겠지만, 언론인의 도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기자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큰 파장을 일으키고 나서야 경찰은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한국인 경찰도 붙여주었고, 그 한국인 경찰분 덕분에 저는 한국인 상담사분께 심리치료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공황장애 직전이었던 상태라...)


https://www.rnz.co.nz/audio/player?audio_id=2018701546&fbclid=IwAR0pAXp-5ClWDO7vqBTmZMbe_RVoR2-rC6BBJcekllqaXWqZmEVkt1adSzY#

 당시 제 인터뷰 본입니다. 뉴질랜드에서 지낼 때는 그곳 억양이 많이 묻어나더니 지금은 도로 한국에서 훨씬 흔한 북미 발음으로 다시 돌아왔네요 ㅎㅎ


 다행히 제가 공채로 들어갔던 대기업에서 호주 출장 후 발령을 다른 도시로 내주는 바람에 이래 저래 이사를 생각했던 차, 더 확실한 다음 목적지가 생겼습니다. 이사를 준비하고 있던 와중에 또 한 장의 협박 편지가 날아옵니다.


 저희에게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저희 집주인과 문제가 있는데 저희가 떠나지 않으면 집주인과 함께 저희 가족까지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2주의 말미를 줄 터이니 바로 정리하랍니다. 저는 무서웠습니다. 당장 나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선 계약 해지도 하고 소식을 알릴 겸 집주인을 불렀습니다. 저희 어머니 벌 되는 나이의 여자분이셨어요. 손주 보신 지 1년 정도 되어 손주를 돌봐주러 호주를 왔다 갔다 하시는데 저희 소식을 들으시고는 전날 뉴질랜드로 돌아오셨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차를 훼손하고 협박편지를 보내는 걸로 봐서 전남편인 것 같다고요.. 이혼한 지 14년 되었는데 그동안 꾸준히 살해하겠다고 협박을 받아왔다고.. 그래서 경찰에 보호를 요청했는데 protection order를 무시한 채 계속 쫓아다녀서 결국에는 몰래몰래 이사를 다니게 되셨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저희 가족이 랜트로 살고 있던 그 주인집을 찾아냈던 겁니다.


 뉴질랜드는 포장이사가 따로 없어요. 있더라도 비용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래서 급작스레 짐을 싸는데 고맙게도 회사 동료들이 또 나서서 도와줍니다. 동네 친구는 아이들을 봐주었고 저희 부부는 짐을 쌌어요.

 제  차에 묻은 빨간 페인트를 손수 닦아 주시던 옆집 영국인 할아버지... 애플파이를 구워와 울고 있던 저를 꼭 안아주시던 옆집 영국인 할머니와 눈물의 이별을 하고 저희는 이사를 떠납니다.


 그로부터 2주 뒤....


https://www.nzherald.co.nz/nz/west-auckland-murder-man-appears-in-court-granted-name-suppression/KHTV5V3NRM6BCPU2ITY4UG3OZU/


저희가 살던 동네에 살인 사건이 생겼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50대 중국계 여성이고 도망가던 범인을 마을 사람들이 잡습니다. 경찰이 5분 정도 늦게 와서 그 사이 붙들고 있고, 칼에 수십 번 찔린 여자분은 돌아가셨다고...


 느낌이 싸했습니다. 그 주인분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고 만약을 대비하여 저는 그 전 남편이라는 사람의 신상정보를 받아두었었는데, 경찰에서는 개인정보라 줄 수 없다고 하니 기사를 낸 기자들에게 범인이 그 사람이 맞는지 Yes or No로만 답변을 부탁하였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습니다. 집주인이셨던 아주머니께서 돌아가신 것이었죠.


 이사를 바로 가지 않고 버텼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 싫었고, 돌아가신 억울한 그분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게 이상한 사람을 만나게 된 건 그분 잘 못이 아닙니다. 부동산에만 맡기지 않으시고 저희가 살 때 집에 문제가 생기면 손수 중개인과 함께 나오셔서 도와주곤 하셨었습니다.


 이 사건이 터지고 경찰을 다시 만났습니다. 아주머니에 대한 추가 진술을 했고, 그동안 아주머니와 주고받은 이메일 및 문자를 모두 제출했습니다.


 남편과 저는 경찰서에 가서 약 2 시감 정도 인터뷰를 하며 진술서를 썼습니다. 저에게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당시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던 학생이었던 저희 남편은 학교 공부보다 진술서가 더 어려웠다고 합니다. (실생활 속 찐 영어의 경험입니다.. 굳이 없었어도 되었겠지만...ㅠㅠ)


 뉴질랜드는 뭐든 참 느립니다. 그래서 최종 재판은 저희 가족이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야 2020년 여름 즈음 치러졌습니다. 저는 온라인으로 참석하여 증언하였습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제가 들었던 그분의 이야기, 우리 가족이 겪었야 했던 험한 일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이야기하고 그 살인자가 절대 뉴질랜드 길거리를 살아서는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재판이 종결되고 사건이 마무리되고, 담당 형사에게서도 이메일이 왔습니다. 멀리서 참석해줘서 본인 일을 도와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안 겪어도 될 일이었지만,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인생이 얼마나 하루하루가 소중한가 한번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희 가족 뉴스가 나갔을 때에도 기사에 달린 (당시 페이스북에도 있었던...) 300개가 넘는 댓글 중에서 몇 개도 저희 가족이 뭔가 잘못을 한 게 아니냐는 그런 속상한 댓글도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나 무식하게 남에게 함부로 상처 주는 사람이 있으니깐요...


 저희 가족이 이런 일을 당할 줄 누가 알았을까요? 그것도 타지에서.. 이 사건 이후 저는 절대 주택에서 살디 못하는 트라우마가 생겼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아파트 대단지에 살며 정말 마음이 편안하고 관리실이며 경비해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매일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최대한 많이 합니다. 또 일단 물질적인 것을 떠나 스스로 꼭 보람된 일을 하겠노라 다짐합니다. 그중 하나가 한국에 와서 영어교육 쪽을 해보는 것이었고, 앞으로는 제 자녀뿐 아니라 더 많은 아이들이 어머니들이 큰 손해 없이 똑똑하게 소비하면서 영어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보는 것이 작은 바람이자 계획이기도 합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제가 영어가 수월하지 않았다면 이런 험한 일도 더욱 어렵게 겪었겠죠. 스스로에게 고맙고 또한 도움을 준 많은 뉴질랜드 분들 친구들의 얼굴이 늘 가슴속 깊이 남습니다. 내가 받은 도움을 또 남에게 베풀고 전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행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