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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Tree Feb 01. 2020

응답하라 '밤을 잊은 그대에게'

육백 삼십구 킬로 헤르츠 동. 양. 방. 송. '밤을 잊은 그대에게'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빼고는 나의 고교시절을 말할 수 없다. 매일 밤 11시,  '시바의 여왕' 시그널 뮤직이 흘러나오고 황인용 아저씨의 편안한 목소리가 들려오면 나만의 세계가 시작되었다. 책상 위 FM 라디오는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마술상자였다.  


수업시간에 있었던 사건, 친구들과의 재미난 일상 그리고 때로는 여고생 소녀의 감성을 쏟아놓은 내 사연은 황인용 아저씨의 그 목소리를 통해 책상 위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신기했고, 재미있었고, 가슴 설렜고,  뭔지 모를 뿌듯함도 있었다. 어느새 친구들도 내 엽서를 기다렸고 나는 그렇게 '밤을 잊은 그대에게'와 함께였다. 


일 년에 한 번 예쁜 엽서 전시회가 있었는데 깨알같이 곱게 써 내려간 사연과 사인펜, 물감으로 정성껏 치장한 내 엽서가 전시된 것을 보는 희열이란.... 좋은 사연 또는 예쁜 엽서로 선정되어 방송국에 상품을 받으러 가는 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방송국 문을 들어서고 제작국으로 올라가서 나의 마술상자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 이런 작은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는구나, 수북이 쌓인 저 많은 엽서 중 내 엽서가 뽑혔다니..'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곤 했다. 정말로 운이 좋은 날은 황인용 아저씨를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내 마술상자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엽서에 글 쓰는 게 좋았고 어쩌다 가 보는 방송국이 신기했고 무엇보다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마술상자가 마냥 좋았다. 대학에 가면 '신문 방송'을 전공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방송국에서 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나는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왔고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밤을 잊은 그대에게'와 나의 마술상자는 나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그 상실감이란.... 


미국에 오자마자 대학 진학을 서둘러야 했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영어도 서툰데 어떻게 신문 방송학을 공부하겠니, 언니, 오빠처럼 의대, 간호대 또는 컴퓨터 공학을 공부해야 여기서 먹고살 수 있다. 이제 신문 방송은 잊어라.'  수학과 물리가 무서운 뼛속까지 문과생인 나는 영어가 서툴고 미래가 밝다는 이유로 '컴퓨터 사이언스'라는 학과에 입학했다. 그것도 심한 경쟁을 뚫고. 하기야 그때는 강의 신청을 줄 서서 했고, 개인 컴퓨터를 사용하기 전이었으며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타자기로 리포트를 작성했던 시절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컴퓨터 사이언스'는 너무나 훌륭한 전공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수학, 물리 강의를 들으면서 이런 어려운 학문은 인류공영에 이바지하겠지만 과연 나하고 무슨 상관일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그리고는 1학년이 끝나기도 전에 신문방송으로 전공을 바꿔야겠다는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고 들었는데 내가 UCLA를 다니던 시절에는 신문방송을 전공하려면 1-2학년 때 관련 학과목을 수강하고 3학년 때 심사를 받아야 했다. Hollywood가 가까운 우리 학교에는 방송, 영화 쪽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많았고 법대에 진학하려는 학생들도 학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는 것이 인기였다.  여하튼 나는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노력을 기울여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고 무사히 졸업을 했다. 그리고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관련된 일을 했지만 방송국에서는 단 한 번도 일해보지 못했다. 


그립다, 황인용 아저씨의 그 목소리 '밤을 잊은 ~~ 그대에게'

요즘도 간혹 7080을 주제로 한 TV 예능 프로를 보다 보면 그 시절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얘기하고 시그널 음악 '시바의 여왕'이 흘러나오곤 한다. 그 시그널 음악을 듣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고, 아련하고, 쓸쓸하고 그리고 내 오랜 추억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응답하라 육백 삼십구 킬로 헤르츠 동. 양. 방. 송. '밤을 잊은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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