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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tie Bomi Son 손보미 May 24. 2016

지적인 여성이 아름다운 이유

#걸그룹은 아름다울까?

‘세상에 저렇게 인형 같은 친구들이 많다니!’


TV 화면 곳곳에 등장하는 섹시, 발랄, 귀염, 청순 등가지각색의 매력적인 여성들이 노래하고 연기하기에 바쁘다. 여성인 나도 넋을 놓고 그녀들의 눈웃음과 몸짓에 시선을 빼앗기기 일수다. 남성들은 침 흘리며 바라본다는 이 콘텐츠들은 소위 말하는 ‘짤방’,‘움짤’, 캡처된 이미지들이 재생산되어 인터넷과 모바일을 장식해버린다.


그녀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잠시. 홀린 듯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현혹된 정신 줄을 다시 잡으면, 우리 사회에 대해 씁쓸한 생각이 든다. 30대가 된 내 눈에만 이상한 걸까. 그들이 예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내가 정의하고 꿈꾸는 ‘아름다움’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를 나이 탓이라 하고 싶지는 않다. 나이와는 별개의 또 다른 문제는 아닐까?


비슷한 성형을 하고,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몸짓으로 방송을 채워나가는 인형 같은 친구들을 보고 있자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힘들다. 정형화된 몇 가지 틀 안에 구별하기 힘든 이목구비와 분위기를 뿜어내는 실루엣. 그와 함께 들리는 음악도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다만, 소위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미의 기준에 상향 평준화된 것은 자명한 것 같다.




21세기의 30대 초반 여성이라면 왕성한 사회활동 혹은 가정 활동으로 적정한 자신의 삶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20대를 겪어오며 만든 가치관이 존재하기에 무엇을 보든 간에 자신만의 취향과 기준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지금의 현실이 어릴 때 그리던 30대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아 한탄하는 모습이 있을 수도 있다. 나도 그런 여자 중에 하나이지만 어린 걸그룹들이 쏟아져 나와 도배하고 있는 방송을 보고 있자면,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안타깝고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걸그룹들은 어린 시절부터 평균 10년이라는 시간의 트레이닝(연습생)의 시절을 거쳐 자기만의 팀이나 아이덴티티를 가진 이들이다. 한류 열풍에 따라 이 인기를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일인가. 오랜 수련을 통해 쌓은 그들의 철학은 작가 말콤 글래드웰이 말했던 것처럼 1만 시간을 노력하며 보낸 이들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경이로운 수준이다.


한류를 따라 전 세계를 휘감고 있는 한국 걸그룹의 여성들.


사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들을 존경하면서 경이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들의 미모와 더불어 아름다운 몸짓과 훈련으로 쌓은 내공과 철학까지. 대단한 사실이다.



당신이 본 것이 당신을 만든다.

You can’t be what you can’t see.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의 멘토이자 미국 아동보호기금(Children’sDefense Fund)의 수장인  아칸소 주 최초 흑인 여성 변호사이자,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의 하나인  메리언 라이트 에델만 (Marian Wright Edelman)의 말이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모바일로 빠르게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걸그룹의 생산은 더욱 많아지고, 물건이 소비되듯 급변하게 소비되는 느낌이다. 몇 개월이 지나면 대세를 이끄는 걸그룹들이 달라지고, 30대를 잘 넘기지 못하고, 20대의 몇 년을 잠깐 반짝 활동하다 해체하거나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이들이 흔하다.


그들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일반인으로서 나는 새로운 여성상에 대해 호기심이 생긴다. 걸그룹이 내 인생 목표가 아니고, 내가 속한 세상이 아님을 안다. 대한민국의 걸그룹은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그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20-30대 젊은 여성들의 꿈이 걸그룹만은 아닐 것이다. 내게 보다 접근 가능하고, 내가 원하는 여성상은 걸그룹과는 좀 다른 세계의 사람일 뿐이다. 걸그룹이 되지 않고, 연예인으로 살아가지 않는 여성은 아름다움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난 부류로 취급되는 요즘. 평범한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여성은 어디서 발견해야 하는 것인가.


어쭙잖은 탄식일까? TV 밖으로 조금만 시선을 던지면, 내가 마주하는 바깥세상에는 걸그룹이 아닌 다채로운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을 찾아보려 노력했고, 연구했고, 만났다.(아니.. 아직 진행 중이다... 힘들고 어려운 주제 ㅠㅠ)  내가 발견한 이들은 걸그룹이라는 카테고리보다는 ‘지적인 여성’이라는 분류가 적합했다. 그런 지적인 여성들은 아름다울까?  




지적인 여성을 말하고 자 하면, 당연히 지식이 많은 것이 주된 이야기라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사전적인 의미로 지식에 관한 것이 맞지만,  우리는 은연중에 지적인 여성이 풍기는 이미지와 아름답다는 단어가 상관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왜 그럴까?


아름답다의 어원을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중세 문헌 표기의 `아름답다`의 `아름`은 알다, 안다, 아름 등의 동음이의어를 가진다. 「알음(知)」과 「답다」의 합성어, 혹은 「아(我)답다」.

그중에 하나는 ‘알다(知)’라는 뜻이다. 알다(知)라는 동사 어간에 `-음` 접미사가 붙은 알음(知)에 `-답다` 접미사가 붙었다는 견해가 있다. 아는(知)것이 아름다움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맞다.


반면 추가적인 해석을 보면, 알다(知) 정도로 ‘아름답다’를 포괄하는 설명이라 하기 어렵다. 아는 것에 걸맞는 행동 또한 아름답다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알고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르는 것보다 더 나쁘다 하니, 아는 것에 맞게 살아가는 것은 아름다운 삶이라 표현하지 않던가.


또 다른 해석으로는‘두 팔을 벌려 껴안은 둘레의 길이’ 그리고 ‘두 팔을 둥글게 모아 만든 둘레 안에 들 만한 분량을 세는 단위’로 ‘아름’을 설명한다.  한 아름, 두 아름 할 때의 바로 그 아름이다. 그렇게 볼 때는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손으로 안고 있는 모습’을 ‘아름’답다로 표현하다. 자기의 능력과 분수를 알아 적당하게 사는 모습이 ‘아(我)답다’ 가 아름다운 것이다.  이에 따라 언어학자들은 아름답다를 `나답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현대의 ‘아름답다’의  어원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가 다변화하면서 외향적인 것에 큰 존재의 의미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정리해보면 이렇다.  지식이 있고, 자신을 잘 알면서, 세상에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훌륭한 마음으로 일을 해나가며 살아가는 모습. 이런 모습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답다 [발음 : 아름답따] (2015년 국어사전 내용 중)

1.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

 예: 아름다운 목소리, 그녀의 눈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곳의 경치는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2.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한 데가 있다.

예: 아름다운 마음씨,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삶을 아름답게 가꾸다.




아름다움(Beauty) 만큼 주관적인 것이 또 있을까? 이 세상에는 아름다움의 대상이 수없이 많다.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하늘도,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도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이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도, 마음을 울리는 시나 책의 한 구절도 아름답다. 봄을 알리는 거리의 활짝 핀 꽃도, 가을의 단풍도, 방긋 웃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도 아름답다. 영롱한 피아노 소리나 절도 있는 무게감의 첼로의 선율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세상에는 다수가  쉽게 인정하는 아름다움도 있지만, 소수에게만 인정받는 아름다움도 있다. 친한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어도 어떤 대상이 아름답고 아니다, 예쁘다 아니다하며 논쟁을 벌이기 십상이다.  비단 걸그룹이나 여배우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뿐 아니라, 오래된 역사 속 인물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클레오파트라, 양귀비, 서태후, 황진이는 정말 아름다웠던가?


1858년 문필가 조르주 상드는 한 일간지에서 모나리자의 아름다움을 평했다.

 “모나리자는 눈길을 끌만큼 눈부신 미모는 아니다. 눈썹도 없고, 빰은 너무 통통하고, 머리카락은 너무 가는 데 반해 이마는 매우 넓다. 샛별처럼 빛나는 눈도 아니고, 뇌쇄적인 성적 매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토록 강한 마력을 풍기는 수수께끼 여인으로 보이는 것은 차가운 적의가 담긴 신비한 미소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그녀를 바라본 사람은 도저히 그녀를 잊지 못할 것이다.” [1]



소설 <황진이>에서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아씨는 생김새로 곱다 밉다 논할 수가 없는 인물일세. 절색은 천하절색인데 생김새루가 아니라 눈부신 빛으로 느껴지는 천하절색이라니까.” [2]


프랑스의 수학 자이 자철 학자인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센티미터만 낮았어도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누구나 선망하는 미의 대명사였던 인물이자 한편으로는 영웅들을 현혹하여 세계를 쥐고 흔든 독약 같은 아름다움은  과연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


국내를 벗어나 해외에서도 ‘아름답다’의 정의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영어의 아름다움(Beauty) 은  어원은 라틴어의 Bellus, ‘ 좋은 것’ ‘선한 것’을 뜻 한다고 한다. 또 어떤 책에는 ‘beauty’는 ‘똑바르다’를 뜻하는 라틴어 ‘bene’에 어원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로마인의 미의 기준은 똑바르고 반듯한 것에 기원해서 훗 날 ‘bene’는 ‘반듯해서 보기 좋다’라는 뜻에서 ‘선하다’ ‘옳다’라는 뜻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어 ‘belle’로 발음이 바뀌면서 ‘반듯한 여자’, 즉 ‘미녀’를 뜻하게 된다. [3]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늘 인류 전체의 관심거리이다.  그러고 보니 사람의 아름다움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다.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섹시한 육체적인 아름다움도 있고, 도량이 넓어 마음 씀씀이가 좋고, 재치 있고 현명한 여성은 정신적으로 아름답다.  격이 있는 말투나 일에 대한 열정적인 태도와 함께 세련된 교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여성은 사회적으로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정의를 살펴보는 것을 넘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대상의 속성인가, 우리가 느끼는 주관적인 것인가. 일례로 최근에 인상적으로 읽은 유시민 선생님의 글을 읽어보자.


레스토랑 사장의 졸부적 심미안을 과시하는 가짜 스테인드글라스 로저 녁 노을이 들어와 여자의 몸에 부서졌다. 수족관 화분 너머로 보이는 옆모습. 윤기를 내며 어깨 위로 떨어지는 생머리, 깨끗한 피부, 선명한 콧날, 여자는 예뻤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내가 그 여자를 보면서 느낀 아름다움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대상 그 자체의 속성인가, 아니면 인식의 주체인 내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일 뿐인까? 아름다움은 대상에 존재하는가, 인식 주체의 의식에 존재하는가? 혹시 둘 모두에 존재하는 건 아닌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구별하는 객관적 기준이 있을까? 미추에 대한 인식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지는가, 사회적으로 습득하는 것인가? 만약 사회적으로 습득한 것이라면 미의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영원한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4]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들의 눈 속에 있는 법이다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클레오파트라, 모나리자 시대의 아름다움과 황진이, 서태후, 양귀비의 아름다움,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시대의 아름다움은 사회적인 의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명한 것은 어원의 기본적인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지식이 있고, 자신을 잘 알면서, 세상에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훌륭한 인격을 갖춘 마음으로 일을 해나가며 살아가는 모습. 이런 모습 때문에 지적인 여성이 ‘아름답다’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1] 이명목 <팜므파탈>,2003 다빈치 p.69

[2] 홍석중 <황진이>, 2002 대훈 p.30

[3] 조승연 <이야기 인문학>, 2013 김영사 p.31

[4] 유시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생각의 글 2015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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