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 턴어라운드
[손보미의 Girl in Tech] 새해를 맞아 가족과 함께 먹을 케이크를 사러 베이커리에 들렸다. 테이블 한 곳에 지쳐 쉬고 있는 가족을 무심코 보았다. 3살 정도로 보이는 아기와 부모가 있었다. 어머니는 피곤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바일로 뉴스 기사를 보고 있었고, 아버지는 지쳐서 테이블에 머리를 대고 쪽잠을 자더라. 아기도 지쳐있을법한데,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미동도 없이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순간 인형인지 사람인지 건드려보고 싶을 정도로 신기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너무나 귀여운 아이가 무엇을 그리 보나 했더니, 요즘 키즈 콘텐츠로 유명해 '캐통령(Carrie + 대통령)'으로도 불리는 '캐리와 장난감 친구들'이었다. 캐리와 장난감 친구들은 '토이 언박싱 채널(Toy Unboxing Channel, 장난감 상자를 푸는 것부터 노는 것까지 보여주는 채널)' 진행자를 물색하던 중 발랄하고 솔직한 이미지의 강혜진씨를 캐리로 캐스팅해 큰 성공을 이뤄 화제다.
이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한 캐리소프트도 초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직원은 3명, 월 매출은 5만 원에 불과했을 정도. 방송연예과 출신 진행자 '캐리언니'는 기업행사에서 사회를 보며 용돈을 벌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당시,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채 방황하던 시절 MC 아르바이트를 할 때 알게 된 캐리소프트 권원숙 대표를 만나면서 동영상 콘텐츠 제작을 함께하게 됐다. 권 대표는 요새 아이들은 형제자매가 거의 없고, 맞벌이하는 부모도 많아서 함께 놀 친구가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많은 아이의 친구가 될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월 매출의 초라함과 기업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낄 때, 힘이 들어 포기하고 싶었다고 회상한다.
특히, 협찬의 유혹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당시 권 대표는 고객의 반응을 살피며, 시험 삼아 협찬을 시도했더니 아이들이 금방 알아차렸다.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던 예전 콘텐츠와는 달리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고, 기획 방향성은 흔들렸으며, 아이들의 반응과 집중도도 예전 같지 않았다. 이에 영상에 방해 되는 협찬은 과감히 포기하고, 회사가 장난감을 직접 구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캐리소프트 목표는 어린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아이가 행복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에만 신경 쓰니 자연스레 다시 인기를 얻었다.
현재 캐리소프트 영상은 온라인을 통해 국경을 넘어 인기를 누린다. 영상을 넘어 뮤지컬도 제작되고 있는데, 인터파크 티켓 어린이/가족 분야 1위 뮤지컬을 기록했다. 또한, 미국, 중국, 일본 등 해외에서도 인기를 이끌고 있다. 캐리소프트의 동영상은 전 세계 50개국 이상 어린이가 시청하고 있고, 현지화로 제2, 제3의 '캐리'를 계속 양성해 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디지털 콘텐츠 제작자를 위한 하드웨어 산업 중에도 멋진 여성 리더가 있다. 최근 고성능 데스크톱 프로세서 라이젠(Ryzen)을 발표한 AMD의 리사 수(Lisa Su) CEO 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서 하이엔드 게이머, 디지털 콘텐츠 제작자, VR(가상현실) 전문가 등을 위한 차세대 고성능 프로세서 라이젠은 새로운 '센스 MI' 기술로 소비전력을 줄이면서 더욱 뛰어난 성능을 제공할 것으로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리사 수 박사가 대표로 임명된 2014년은 AMD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인텔이 세계 CPU 시장의 87%를 점유하고 있던 시기. 한때 라이벌이었던 인텔보다 앞서 64bit 범용 CPU를 발표했던 AMD였지만, 당시에는 초라한 성적표만을 받고 있었다. 낮은 가격의 제품을 근근이 팔아가며 인텔보다 뒤처지는 기술과 성능으로 경쟁우위가 없었다. 당장 기업 정리 절차를 밟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문도 무성했다. 하지만, 리사 수는 벼랑 끝에 있던 AMD를 일으켜 세웠다.
가장 어려울 때 임명된 신임 CEO로서의 리사는 기존 경영자들과 너무도 다른 존재였다. 40대 아이사인, 여성, 공학도. 흔히 보는 경영자가 아닌 전형적인 공학도인 그녀는 MIT 박사 출신으로 그 경력의 대부분을 IBM 연구실에서 쌓았다. 40개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고, 소자 물리학의 세계에 바친 외골수 타입의 엔지니어로 평판이 나 있었다. 한때 레노버를 전세계적인 히트 상품으로 만들었던 전 CEO 로리 리드(Rory Read)와 같은 경영의 고수도 AMD의 주식가치를 높이진 못 했던 위기 상황에서, 기업의 실적 및 가치의 턴어라운드를 보여줬다. 세계 500대 기업에서 유일한 여성 CEO였고, 경영자로서 별다른 능력을 보이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뜨렸다.
단 2년 만에 40대 아이사인 여성 공학도가 사업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어낸 이야기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그 중심에는 기업의 핵심에 집중하는 능력이 있었다. 여러 사업을 정리하거나 새로운 인수 합병에 골몰하여 재무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는 이전 경영자들과는 달리 리사는 회사의 가장 핵심 기술에 근거해 이를 더욱 개발하였고 개선해 나갔다. 기업과 주식 가치 상승뿐만 아니라, 인텔의 최고 고성능 CPU에 맞장 승부수를 띄우는 ‘라이젠' 이외에도 차세대 게임에 경쟁을 하고 있는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사도 AMD 의 같은 CPU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사업을 할 때, 우리는 어느 순간에 벼랑 끝이라 여길지 모른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는 고객의 반응이 예전과 같지 않음이, 누군가에는 매출이 적음이, 누군가에게는 사업의 발전 방향성이 원인이 되기도 하고, 복합적인 것이 이유가 되기도 한다. 결국엔 모든 요소들이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데 쓰이는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그게 정말 중요하냐?”
한 지인은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줄 때 습관적으로 위 질문을 한다고 한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첫 사업을 매각할 때쯤, 사업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 때였다. 그러나 내가 시작한 사업이 꼭 내 자식인마냥 포기하기가 힘들었다. 비즈니스 상의 부족한 면도 많이 보였지만, 의지인지 고집인지 모를 마음의 끈을 놓지 못했고, 그만둘 엄청난 용기도 없었다. 그 때 운 좋게도 몇 개월에 걸쳐 서너 차례의 M&A 제안이 들어왔었다. 어떤 것은 기업의 가치가 맞지 않았고, 어떤 케이스는 기업의 비전과 커리어 상의 미션이 맞지 않았다. 인수나 합병의 기회를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벼랑 끝에 있을 때, 적정한 밸류와 비전이 맞는 회사를 만났고 딜을 마무리했었다. 성공적이었다기 보다는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는데, 덕분에 이후에도 몇년간 원하는 사업을 다양한 방면으로 진행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감사한 순간이었다.
위기를 극복하여 기업의 성적을 성공적으로 턴어라운드 시킨 두 케이스의 공통점은 벼랑 끝의 순간에서도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한 것이었다. 캐리소프트는 아이들을 행복하게 할 콘텐츠에, AMD는 프로세서의 기술적인 혁신으로 이를 증명했다. 2017년 새해, 연말에 끝내지 못 했던 고민들과 새로운 많은 결심 속에서 혼란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누군가에게 올 한해가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정말 중요하냐?’ 는 질문은 가장 먼저 필자 스스로에게 던질 말이다. 내 개인의 삶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 혼란스러운 대한민국 사회와 국가에도 한결 명확하고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신년이 되기를 감히 기도해본다.
글 손보미
동아일보 칼럼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70104/82180017/1#csidx7c9ac431fd1f018a4f3fa58eb6aa4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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