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의 하얀 겨울 모자

어승생악

by 병욱이

추위 속에 자만하는 아저씨와 빵


언제나 그랬듯이 구름이 몰려와... 안개였나? 한라산의 얼굴을 가린다. 여기까지 왔는데 으~ 화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 다시 얼굴을 내미는 한라산 봉우리. 입가의 주름과 눈가의 주름이 미소를 만들어낸다.

사진을 찢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너도, 나도 찍는 휴대폰은 생략이다. 카본 삼각대를 어깨선까지 세워 13*20의 필터를 장착한 카메라가 눈에 띈다. 일단 말을 덜어볼까 생각했지만 참기로 한다. 나는 나대로 한라산 포획 지점을 바꿔가며 찍는다. 10분 지났을까? 어승생악 입구에서 만났던 여사님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첫 만남이지만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반갑다.


“어~ 아이젠을 차고 올라오셨네요. 아이젠이 없어 집으로 되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가방에 가져왔었어요, 제대로 찬 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좋은 사진 좀 찍었어요.”


수다를 떨며 다시 한라산이 제일 잘 보이는 위치로 옮겨간다. 여사님의 등장은 어찌할 바를 몰랐던 두 명의 남자에게 연결고리가 되었다.


어승생악2-6.jpg


“저 사진사분은 카메라가 고급스러운 게 분위기가 좀 다르네요.”

“아~ 삼각대에 필터를 장착한 거에요. 저는 필터가 귀찮아서...”

여사님이 한 남자에게 대화를 건넨다.

“사진 좋은 거 많이 찍으셨어요. 언제부터 계셨어요.”

“여기 온 지 3시간 좀 되었습니다.”

옷차림을 추정해봐서 그 남자의 말은 거짓에 가깝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남자다운 면모를 과시하기 위한 행동으로 비췬다. 1,172m 고지대로 겨울의 매서운 바람과 생각보다 얇게 입은 옷차림이다. 언뜻 봐서는 나보다 더 외투의 두께가 얇아 보인다.

“안 추우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고산리에서 왔습니다. 오랜만에 내복도 껴입고 새로 장만한 등산화를 신고 왔더니 괜찮네요.” 그렇게 말하지만, 장갑을 낀 손은 겨드랑이로 팔짱을 낀 모양이 춥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여사님의 눈초리는 여전히 뭔가 안쓰러운 표정이다.

“배고프시면 빵 하나 드실래요. 제가 사 온 게 있는데... 코로나 시기라 좀 그렇나요.”

주저 없이 당연하다는 듯 “주시면 고맙죠.” 하면서 손을 내미는 아저씨. 성산읍에서 거주하는 여사님이 사 온 보리빵과 쑥 빵이다. 빵의 정체를 알고 보니 내가 잘 알고 있는 그 빵집이다. 여느 보리빵과 다르게 달지도 않으면서 담백한 맛에 빠진다. 눈꽃의 차가운 기운을 담고 불어오는 바람을 뚫고 대화는 20분을 흘렀다. 여사님은 몸에 한기가 돌았는지 먼저 가보겠다는 말을 던지고 인사와 함께 훌훌히 떠나갔다. 맛있는 빵을 줘 고맙다는 말과 인사를 건넸다.

또다시 썰렁한 남자 둘만 남게 되었지만 이미 2m 되는 돌담에 문이 열린 상태다. 여사님의 터놓은 따스한 정으로 빈자리의 싸늘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둘은 속닥속닥 30분을 더 얘기를 나눴다. 대한사진사협회 소속이며, 내일부터 문예회관에서 일주일간 전시회를 연다는 내용까지. 그 속에 “내 사진은 걸 수 없나?”라는 생각이 스며든다.


왼쪽으로 작은 두레왓, 큰 두레왓이 있고, 오른쪽으로 영실 코스를 오르며 만날 수 있는 윗세오름, 만세동산, 사제비 동산



천아오름, 큰 노꼬메 오름, 큰 바리메, 족은 바리메 오름

백록담 그의 자식들


어승생악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은 영실코스와 성판악 코스에서 맛보는 것과 다른 한라산의 면모를 드러낸다. “나 혼자 산다”에서 전현무가 백록담을 오르며 했던 말이 기억난다.

‘한라산은 세계 어느 산보다 아름답고 죽기 전에 꼭 와봐야 할 산이며, 스위스의 알프스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곁에 있어 모를 뿐 한라산은 팔색조 미인에 가깝다.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현저히 다르다. 어승생악의 겨울 한라산에 넋을 잃어버릴 정도다.

바라보이는 백록담 남벽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작은 두레왓, 큰 두레왓이 있고, 오른쪽으로 영실 코스를 오르며 만날 수 있는 윗세오름, 만세동산, 사제비 동산 등이 팔을 뻗고 있다. 마치 한라산의 큰 기둥은 엄마가 자식을 안고 있는 모습처럼 그려졌다. 어승생악 정상에서 직선거리 3km 정도로 가깝고도 먼 당신의 손길이다. 슬퍼할 일만 아니다. 한라산과 외면한 채 등을 돌리고 밀당을 가져보기로 한다. 야속하다 이럴 줄 몰랐다. 덩치 큰 한라산을 등지니 족은 오름이 날 봐 달라며 안개를 뚫고 나와 굳이 손을 흔든다. 희미해진 세상에 어깨를 마주하며 울렁울렁 능선을 이룬다. 한라산 둘레 길의 천아 오름을 너머 멀리 큰 노꼬메 오름, 큰 바리메, 족은 바리메 오름이 눈에 선하다. 한라산의 정상은 아니지만, 그만큼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삼각대에 장착된 카메라와 아저씨는 일편단심 백록담만 바라본다. 1시간을 어승생악 정상에서 눌러앉았으니 1시간에 한 대뿐인 버스 시간에 맞춰 내려가야 할 다가왔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어승생악 길


어리목 버스 정류장에 내려 어리목 탐방로까지 혼자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막막했지만, 여사님의 동행은 제주의 변화무쌍한 날씨처럼 인연이 되었다. 1km 안팎의 짧은 아스팔트를 걷고 어리목 주차장에 들어서 서로의 공간을 찾아 여사님과 헤어진 후 혼자가 되었지만 이젠 혼자란 수식어는 버릴 수 있다.

바글거리는 인파로 조용한 숲속의 향기는 사라지고 어리목 탐방 안내소를 쩌렁쩌렁 울리는 대화가 귀를 파고들었다. 주차장을 꽉 메운 자동차 위로 하얀 눈꽃이 눈부시게 반짝반짝 빛났다. 따스한 겨울 햇살 아래 몇 시간 안에 사라질 것 연약한 눈꽃은 누군가 보석을 뿌려놓은 듯 보인다. 몇 시간만이라도 녹지 말고 그대로 있어 달라며 어승생악의 정상을 향해 출발이다.

예상대로 아이젠 없이 갈 수 없는 어승생악의 정상이다. 어리목 코스와 어승생악은 형제 아니랄까 입구의 모양도 비슷하다. 가파른 듯 아닌 듯 쌓인 눈이 솔찬히 미끄럽다. 눈이 내린 겨울이니 당연하다. 봄, 여름, 가을이었다면 누구나 오를 수 있는 계단이 마주했을 것이다. 눈길에 미끄러져 로프를 잡고 거의 앉은뱅이 자세로 내려오며,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눈썰매장을 연상케 한다. 나무 사이로 곡예를 펼치는 모습이 위험해 보였고 영실코스에서 마주했던 모습이 어승생악에서도 연출되었다. 힘겹게 내려오는 그들의 모습에 안쓰럽지만 고소하다는 생각도 든다. 겨울 산행에 있어 예측하고 만발의 준비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 면에 있어 당해도 싸단 말이 딱 들어맞는다.

가깝게 보였단 정상이 코 닿을 듯했지만 큰 오산이다. 중간쯤 올랐을 때이다. 부부 한 쌍이 겉으로 보아선 평온했지만 망설임이 포착되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이 앞섰다. 따져 볼 필요도 없이 단숨에 말을 건넸다.

“뭘 잊어버리셨나요. 아니면 어디 다치시기라도...”

너무 오버했던 것일까? “남편이 힘들다고 오르기 싫어하네요.”

희망 고문을 던지기로 맘먹었다. “어승생악 전경을 못 보고 간다면 정말 후회하실 겁니다. 여기서 10분이면 되어요.”

어림잡아 이야기했을 뿐이고 달콤한 거짓말을 부부는 넙죽 받아먹었다.

숨을 크게 쉬고 나면 경사를 지나 평탄한 길을 잠시 만난다. 쉼은 그렇게 겨울을 맞은 어승생악의 진 묘미를 드러낸다. 정상이 다다랐을 때쯤 나무의 어깨 위로 드디어 한라산의 풍채를 마주한다. 하얀 목화솜을 덮은 겨울의 어승생악은 또 다른 그림을 펼치지만, 1.3km의 구간을 하얀 눈을 마주하며 걷는 내내 생각에 잠긴다.



생각은 끝없이 머릿속을 휘휘 휘둘렸다. 어승생악을 오르며 잠겼던 생각은 내리막길을 달리면서 조차 두뇌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얀 눈은 아무래도 백지장처럼 모든 걸 머릿속으로 집어넣는 듯하다. 미끄러질 듯 말 듯한 걸음걸이로듯 한 걸음걸이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먼저 내려간 여사님의 행방은 찾았지만 보이지 않고 곧 닥칠 버스의 입장에 마음만 다급해졌다.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1.9km 정도의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매거진의 이전글마지막이 아닌 "NEXT" (오름 투어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