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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욱이 Mar 28. 2023

강제 해산

22. 03. 28 사계해변 올레 10




거실을 비추는 이침 햇살 어느때처럼 베란다 창너머 하늘을 살폈다. 흐리겠다는 일기예보와 상반된 청명한 하늘에 왠지 배신감마저 든다. 부랴부랴 얼굴을 씻고 밥을 먹고 언제처럼 나의 동빈자인 버스 정류장으로 길을 나선다. 


한참 평화로를 달려 렌츠런파크에(경마장) 닿을쯤이다. 미세하지만 휘청거리는 버스에 차멀미에 취한 졸음이 달아난다. 자연스레 차창밖으로 눈길이 쏠린다. 

바람이 장난 아님을 감지한다. 약도 중도 아닌 최고 난이도 수백개의 선풍기를 코앞에 틀어 놓은 모양이다. 마치 여름 태풍이 미리 찾아왔나 싶을 정도다. 위새 당당하던 아침의 맑은 하늘과 태양은 어디로 갔을까? 


하늘에 시커먼 먹물을 뿌린다. 여긴 중산간이라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여기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잠은 이미 지구밖으로 떠났다. 중산간을 지나 점점 가까워지는 목적지이지만 상황이 바뀔 여지도 주지 않는다. “뭐야 이건 아닌데...” 연신 날씨의 일탈에 불야성 같은 희망도 꺼져버렸다. 아침 햇살은 나를 낚기 위한 달콤한 미끼였음을 깨달았다. 


하늘에 먹물을 쏟아붓던 노란 유채꽃밭 주변은 봄을 찾아 나선 사람들로 득실거린다. 뒤틀려 버린 마음은 그런 모습이 맛있는 음식에 꼬인 똥파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계해변을 거닐며 꼬이고 앃여가는 억울함을 풀어 헤친다. 밀려오는 파도에 억울함 하나.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억울함 두개. 어쩌다 유린당한 마음을 털어낸다. 


위이잉~ 긴급메세지가 울린다. 어업은 조업을 나가지 말고 선상이나 바위 위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은 태풍급 강풍에 유의하라는 안전문자다. 


에라 모르겠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좋은쪽으로 생각하기로 고쳐먹는다. 


‘정말 이대로 괜찮겠지?’


사계해변을 찾는다고 용을 써도 올레 10코스의 범위 안이다. 행복한 뫼비우스의 고리에 갇힌 꼴이다. 그렇다고 늘 같은 모습을 마주하기 위한 노동은 아니다. 얼굴의 표정은 눈에 담을 수 없는 수천가지의 풍경을 담고 매력을 발산하는 사계해변이다. 그중에 단연코 한가지를 뽑자고 말하자면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쉬이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암석이 늘린 코지다.


하늘은 시커멓게 멍들어 있지만 오랜만에 맘에 드는 구도에 심취해 간다. 찍을 땐 3장 이상을 넘기지 말자는 신조가 깨어졌다. 단정하게 빚고 온 머리카락은 이미 이리저리 날려 산발이 되었지만 바람과 함께 단단히 화가 난 파도를 등에 지고 바위를 지지대 삼아 버티는 발이다. 종이짝 같은 가벼운 몸이 들썩거림에 뒤틀린 사진이 속출한다. 금방 쏟아부어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에 마음만 조급해진다. 서둘러 몸을 놀려보지만 찜찜한 손놀림에 움직임이 둔하다.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 할 입장이다. 자꾸만 울려되는 긴급문자에 두려움이 동반된다. 얼마지나지 않아가비도 퍼부을 예정이다. 송악산을 건너뛰고 섯알오름을 오른다. 습도 100%에 몸은 끈적거리고 험상궂게 찌푸린 막구름은 더욱 짙어 보인다. 몇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처음이다. 드디어 같은 목족지, 같은 공간을 나눌 사람의 향기가 풀풀 풍긴다. 갈듯 말듯 그들을 기다리다 뒤선에 자리를 잡는다. 거리를 유지하며 인사를 건낸다. 


단조로운 인사를 제외하곤 반응이 미미하다. 그들만의 끈끈한 유대감이 돈독하다. 부부라서 그러할 수밖에 없다지만 유독 다른 올레지기에 비해 차갑다. 얼음 삼춘과 하르방이다. 


다가가려는 입장에 벽을 세운 그들을 마음을 보기간 여간 쉽지 않다. 원래 가야 할 각자의 길로 방향을 튼다. 굳이 체력을 소비해 가면서까지 안달복달할 이유를 만들기 싫다. 


마음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알뜨레 비행장 옆까지 도달했다. 발걸음을 멈춰선다. 늘 처음 보는 마음, 겨울 속 제주의 푸르름을 느낀다. 어찌보면 너무 식상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빗방울이 뚝뚝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더는 지체할 핑계도 질 수 없기에 무작정 길을 따라 걷는다. 200m, 300m 더욱 거세진 빚줄기에 바람이 돕고 나섬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담스럽지만 연약한 우산을 꺼내든다. 허리라도 휙 꺾일까하는 걱정과 달리 잘 버틴다.


후다닥 바람에 우산이 요통치며 울어된다. 자칫 조금의 실수에 우산이 부서질까 우산을 안다시피 꼭 끌어안고 종종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한번은 격어야 될 일이다. 결국엔 우산이 훌러덩 속살을 깐다. 뼈대라도 부러졌을까 노심초사 비를 맞으며 살피지만 크게 이상은 보이지 읺는다. 이제 남은 건 시간과의 싸움뿐이다. 멈춰버린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의 속도를 한단계 끌어올려 보지만, 알 수 없는 바람의 동작에 속수무책이다. 비는 옷을 젖히고 우산의 기능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이대로 어두운 밤이 시작되기 전 항복의 두팔을 올린다. 강제해산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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