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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욱이 Jun 17. 2023

천만다행이다

21. 05. 07




헐레벌떡 도착한 운진항은 사람으로 발 디딜틈이 없다. 모든 걸 제껴두고 배표부터 사수해야 한다. 처음도 아닌데 다급한 마음에 두뇌가 꼬였고, 우왕좌왕 발만 동동 굴리다 간신히 예매를 마쳤지만 찌뿌둥한 마무리에 찝찝하다. "10시30분 배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판매원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저기 10시 30분 배편 말구 11시로 주세요.”


“10시30분 배가 마지막이 될 수 있습니다.”


‘앵무새야 뭐야.’


“그럼 옆에 아저씨는 11시 배 예약했다며 표 발급하는데 뭔가요.


“오늘 파도가 높아서 10시 30분 이후로 배가 안 뜰 수 있습니다. 어떻하시겠습니까?”


“10시30분 배가 마지막입니다.”


확실한 근거의 증빙 자료를 보여달라고 할 수 없어 어쨌든 그녀의 말을 믿기로한다. 주섬주섬 표를 주머니에 넣고 부풀어 오른 방광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로 달려갔다. 혼잡한 매표소 대기실만큼 좁은 화장실도 만원이다. 소변을 누는데 줄을 서야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몇 분의 기다림 우여곡절 끝에 화장실을 빠져나왔지만 시간은 저만치. 느긋이 감상따위를 즐길 여유는 금물이다.


10분에서 15분 사이면 가파도에 도착한다는 방송과 함께 출항을 알리는 굵직한 엔진을 울렸다. 곧 배는 발버둥을 치는 파도와 맞닥뜨렸다. 배안을 채우는 속삭임과 마주한 파도에 신난 아우성이 들린다. 바다위를 달린다는 두려움은 잊은지 오래다. 창밖으로 넘실거리는 파도와 달리 유리창까지 튀는 파도의 몸부림이 거칠다. 오르락 내리락 뱃속의 내장이 춤을 춘다. 놀이동산의 바이킹이라는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 이러하다. 몇시간전에 먹은  올라오면 큰일이다. 뱃속은 가마득한 수심을 걸었고, 옆에선 뭐가 그리 좋은지 3명의 아가씨의 수다가 출렁인다. 혼잡한 수다를 벗어 날 배는 항구에 닻을 내렸다.


배에서 내린 몸이 거쎈 바람에 휘청거린다. 휘청거리는 몸은 약주라도 한 잔 했을 모양이다. 몇 번 가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사람이 몰리지 않는 한적한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파도너머 송악산과 봉긋 솟은 산방산이 희미하게 눈가를 먼저 적셨다. 일단 가파도의 첫번째 비경에 눈은 호사를 누린다. 이제는 두번째 풍경을 마주할 차례다. 넘실거리며 춤추고 있을 청보리다. 조급해진 마음을 붙잡고 좁은 길목을 따라 오른다. 바람에 부딪히며 행진하는 보리가 눈앞에 선하다.


생각처럼 순탄치 않다. 어찌 알았을까. 우르르 몰려오는 인파로 설자리를 잡지 못한다.


가파도를 잃어버린 미아가 되었다. “가파도를 찾고 있습니다. 보신 분은 가파도 선착장으로 연락주세요.”


보리밭 길을 따라 이리저리 나만의 장소를 찾아 헤맨지 1시간이 지났을까? 파도를 헤치고 한대의 배가 가파도 항에 다다랐다. 시계를 바라보자 혈압 상승은 피가 거꾸로 솟았고 뒷목이 뻐쩍지근해졌다. 10시 30분이 마지막이 배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확고히 못박더니 벌써 두번째 배가 가파도를 들렸다. 판매원을 찾아가 잃어버린 시간만큼 돌려받고 따져볼 것이다.


가파도 보리길을 지나 전망대로 다시 바닷길로 바람을 쳐맞는다. 상쾌한 날씨에 대한민국의 제일 끝섬 마라도가 나타났다. 이제 반 틈의 섬을 보았으니 아직 반이 남은 가파도. 시간은 반토막이 났고 떠나야 할 시간만 코앞으로 거센 바람을 타고 쓸려왔다. 코를 자극하는 음식의 달콤함도 걷어내고 중년의 보리를 만나려 간다. 떠나려는 자와 남는자의 엇갈린 만남. 배는 저 멀리 포말을 만들며 가파도와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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