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29
김녕에서 해녀박물관까지의 올레 20코스를 걷는다. 생각과 생각으로 가득찬 머리를 비우기 위한 몇가지 되지 않는 선택지 중에 한가지다. 늘 같은 마음으로 집밖을 나서지만 머릿속은 더 복잡해지기 일쑤다. 생각의 꼬리는 우주의 끝을 알 수 없듯 머리를 떠날 일이 없다. 어쨋거나 남흘동 버스 정류장에 내려 19코스를 약간 맛본 후 20코스 들어선다.
태양의 뜨거운 열기에 몸은 점차 데웠지만 날씨만큼은 이뤄 꼬투리 잡을때 없는 금상첨화다. 장마가 찾아온다며 떠들어되는 뉴스와 전혀 반대다. 연일 가뭄에 고통받는 사람. 비 소식이 그립지만 아무래도 마른장마다. 1280m 높은 고지대에 뿌리는 이슬방울이 전부다.
몇해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풍경은 나의 입맛이 변한걸까. 달갑지 않은 모습이다. 빈 공간을 가득 매운 새로운 건물을 멈춰서 버린다. 변함 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경운기 한대에 눈이 꽂힐뿐이다. 마을은 빠져나와 바닷길로 접어들었다. 반가움에 인사라도 하듯 격하게 맞아주는 바람레 몸이 휘청거린다. 바람을 마주하고 오늘의 난관이 시작되었다.
바람에 휩쓸리는 모래 폭풍에 몸을 움츠린다. 어찌알고 드러난 피부를 향해 헤딩이다. 바늘 가시에 콕 찔린듯 따갑다. 작은 모래알 수십개가 데구르르 굴러 나를 덮쳐온다. 웅크리며 방어에 나섰지만 역부족이다. 바람의 협력에 모래는 더욱 기세등등하게 멈출 마음이 없어 보인다. 달려드는 모래에 물러설 수 없기에 개긴다. 승리를 이뤄낼 수 있을까. 바람을 꼬득였지만, 바람에 몸을 맡겨 덩실덩실 춤을 추는 파도가 있는 바다 끝자락으로 도망치듯 피난행이다.
김녕의 격한 마중에 울퉁불퉁한 바닷길은 부담스러운 사랑이다. 병원을 들려 조금은 늦은 출발에 조급해진 마음. 움직임은 현저히 줄어들고 김녕 앞바다에 풍덩 빠진 마음부터 건져야한다.
행원리에 다다랐다. 마을을 돌아 밭담길을 걷는다. 뒤틀려도 단단히 꼬였다. 텅빈 밭과 쨍쨍내리쬐는 태양과 동행은 지루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같이 끓어오른다. 두뇌도 녹기 직전이다. 생수도 어느샌가 미지근히 데워져 나의 정신은 혼잡한 교통 체증에 들어섰다.
그 증상으로 혼잣말을 한다. 큰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엠씨 더 맥스의 처음처럼이다. 시작부터 끝날때까지 고음이 절정을 이룬다.
“피어나 단 한번도 겨울이 없었던 것처럼”
심장에서 뿜어져 나와 더 달궈진 피물은 온몸을 열기로 애워싼다. 조금이라도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쉬고 뱉지만 코끝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타는 냄새에 다시 발목을 잡혔다. 태양마저 삼켜버린 까만 밭담너머 희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분명 아무도 없는 허망한 밭 가운데 불을 짚혀놓고 사라졌음이다. 궁시렁 궁시렁 혼잣말로 들끊는 화를 꾹누르며 주위를 살핀다.
“위험하게 누가 밭에서 또 쓰레기를 태우는 건가.” 제주에서 길을 걷다 보면 불낸 흔적의 현장을 자주 목격한다. 쓰레기 분리수거라는 현대적인 놀이는 도시에나 있을법한 이야기다.
말을 밖으로 꺼내는 순간 놀라울만한 그림자가 비췬다. 불을 피운 당사자이다. 묘한 기분을 짜낸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에 베트남에서 볼법한 삼각 모자를 쓴 연령은 알 수 없지만 아주머니다. 고개를 숙인채 휴대폰 삼매경에 빠졌다. 곰팡이내 나는 입을 열려 다가갔지만 섬뜩한 기운에 멈칫한다.
4시간을 걷고 있는 순간 무슨 불운이 닥칠걸까. 그림자 하나를 마주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라는 신의 계시인걸까? 구름속을 들락날락 허망한 빛만 나의 그림자를 빚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