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20
약속도 잡지 않은 늦은 오후의 저녁 무렵(해는 지지 않음) 우도 방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마 마지막 배였지 쉽다. 식사할 장소도 잠자리도 준비되지 않은 무방비 상태로 무작정 입도한 우도는 처음부터 쓰고 매운 맛을 안겼다. 국내인이 국내를 여행하면서 이렇게 비참할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현실이 된 날이었다.
우도 방문의 쓴 맛을 교훈삼아 새롭게 찾은 가파도의 만남은 시간에 쫓겨 숨소차 맘대로 쉴 수 없는 하루로 시작을 알렸다. 아침부터 머리속은 포탄이 터지고 사이렌이 울렸고, 버스로 1시간 30분을 달려 9시까지 운진항에 다다라야 하는 의무감을 배당받았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버스에 몸을 실었지만 불안감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어떤 연에서인지 주변마저 암울하게 느껴진다.
운진항 대합실의 모습에 적잖이 놀람을 금치 못한다. 복짝할거란 인구 대란은 어디에도 없고 먼지도 잠잠할만큼 황량하다. 믿기지 않는 현상에 미쳐 날뛰며 기뻐할듯 싶지만 그와 반대다. 소나기가 내리듯 불안감은 급물쌀을 타고 불길한 징조가 엄습해온다. 배표를 구매해 배에 올랐지만 불안감은 역시 내 주위를 맴돈다. 껄끄럽지 않은 공기는 몸을 조여왔다.
풍량주의보가 내려진 것도 아닌데 얼핏 눈으로 보아 넘실되는 파도의 높이는 3m 이상 된다. 블루레이 2호에 부딧치는 거친 파도의 저항에 울렁거림은 아침부터 따라다니던 불안감이란 요소다. 파도가 부닥칠때면 이러다 배가 가라앉는 것은 아닐지 두려움에 휩싸인다. 나뿐만 아니다 블루레이 2호에 탑승한 50명의 승객이 숨을 죽이며 창밖만 바라본다. 철렁되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10분이면 될 거리를 25분이 지나서야 가파도 선척장에 다다랐다. 거친 파도에 속이 좋지 않았던 걸까? 너나 할 것 없이 먼저 내리겠다면 아우성이다. 양보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새치기가 우선순위다. 사람과 사람이 치이기 전 한발 앞서 가파도의 풍경으로 빠져 들었다. 그 뒤를 함께 온 이 선생이 뒤따른다. 나는 이 선생이 움직여야 할 죄표를 가리키는 바늘이 되었다.
"아~ 이쪽으로 오세요. 저기가 끝내줘요." 이 선생은 이끄는대로 발걸음을 옮기며 쉴 새 없이 카메라 버튼을 누른다. 1년전 만남에서 이 선생의 사진의 방향을 알았기에 궁금하진 않았다.
그림자 놀이도 10분이 지나서 끝났다. 서로의 보는 가파도의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몇번째일지 모르는 기파도 행. 나는 기억에서 사라진 길을 찾아 나서고 이 선생은 그만의 길을 찾아 나섰다.
2시간의 여유가 있지만 그렇게 여유롭지 않다. 좀 더 보겠다는 담겠다는 의지에 조급함이 생겨버렸다. 가파도의 명품 보리를 제치고 집과 돌담이 있는 골목길로 향했다. 까만 구멍이 숭슝 뚫린 현무암 돌담은 까만 정장을 입고 모델이 되었다. 오로지 까만 빛만 발산하는 현무함의 분위기가 묘하다. 섬속의 섬이라 더 독특한 모양으로 그려진다. 올레길을 걷는 사람, 돌담에 취한 사람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파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멍하니 서 한참을 바라봤다. 지붕으로 파도가 쳐올랐고 파도 넘어 송악산과 산방산의 작당 회의가 열렸다. 제주란 섬속의 섬 가파도를 따돌리는 느낌이다.
이제 서서히 보리를 찾아 떠난다. 헤어졌던 이 선생이 근방에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판단 미스다. 전망대에 올라 찾아봐도 그림자조차 없다.
“아~ 이 선생님 어디세요”
“저는 여기 가파 초등학교 근처에요.”
다소 멀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은 재차 확인했다. 서둘러 이 선생쪽으로 달려갔지만 또다시 숨비꼭질이 시작되었고 가파 초등학교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모습은 흔적조차 띄지 않는다.
“저 여기 가파 초등학교 잎인데 어디 계셔요.”
“아~ 저 거기서 좀 더 걸어 올라오면 있는 호랑이식당 앞이에요. “
그새를 못참고 발바리처럼 쪼르륵 장소를 옮겨간 이 선생이다.
“제가 바로 갈테니까 거기 좀 계세요”
바람 스치듯 모든 걸 지나 말한 장소로 달려갔다. 두리번 두리번 식당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 선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저 호랑이 식당 앞인데 어디 계신건가요”
“여기 모퉁이 돌아서 거긴데”
방향 감각마저 잃게 만드는 이선생의 행방이 묘하다.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는건지 모른다. 검은 돌담 그림자속에 숨어 어디선가 몰래 지켜보고 있는건 아닐까. 팔에 털이 곤두설 섬뜩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제 가파도를 떠나야 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디서 뭘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