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9
길을 걷다 아름다운 풍경에 폭 빠져 넋을 잃고 바로보는 그때, 불청객이 끼어 든다. 까만 몸뚱어리에 오렌지색 포인트의 고무 잠수복은 단조롭지만 해녀의 숨겨진 각선미를 드러냈고 과시하는 듯 위풍당함이 느껴졌다. 불청객 중에 이렇게 반가운 불청객은 난생 처음이다. 불법 촬영은 법적으로 감옥살이 또는 벌금형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지만 내면에 숨어있는 열정이 끊어오른다. 해녀의 뒤를 살금살금 따라가며 걸어가는 모습을 한 컷, 한 컷 신중을 기하며 작은 단추 하나 셔터를 누른다. 아마도 초상권 문제로 법정으로 번질 일은 것으로 보인다. 바위에 걸터 앉아 바다로 나갈 채비를 하는 해녀의 얼굴이 수경(물안경) 아래로 드러났고 세월의 주름이 곱게 파였다. 주름이 깊게 파였지만 외모에서 느껴지는 나이는 대략 60살이 넘어 보인다. 90세에 가까운 해녀 할머니가 아직 현장에서 일하는 만큼 60대는 이팔청춘에 가깝다.
"안녕하세요. 전복 따러 가시는 거에요? "
늘 그렇다시피 해녀의 만남에 있어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소라 주으러 가"
"소라요. 요즘이 제철이에요?"
"그렇지는 않는데 일을 해야 먹고 살지"
“맞아요. 일을 해야지. 땅파서 돈이라도 나오면 좋은데.(혼잣말로)”
"혹시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70이 넘었지"
"지금이야. 몸에 익어서 괜찮지만 젊었을적에는 물질을 하고 나오면 온몸이 죽어나갔다니까. 이제는 그러니 하지“
제주는 어딜가더라도 젊은 해녀를 찾아보긴 힘들다며 한숨 섞인 소리가 파도와 밀려왔다. 해녀의 평균 나이는 끽해봐야 60초중반이 젊은층에 속했고 최연소자였다. 60 평생 거친 파도를 헤치고 물질을 해가며 가정을 꾸려나가던 제주를 주름잡던 젊은 해녀는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고 얼굴에는 온갖 역경의 주름만 자글하게 녹아내렸다. 60부터 인생의 시작이라지만 고된 물질로 연골은 닳고, 관절은 삐거덕거리고 머리카락은 희끗희끗 하얀 포말이 머리에 얹혔다. 이젠 뒷방 늙다리 할망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3분 동안 숨을 참고 바닷속을 누비는 해녀의 체력은 나보다 더 월등해 보인다. 파도의 손짓에 넘실거리는 하얀 포말은 해녀의 한숨이 섞인 건 아닐까?
얼마전 TV에서 본 다큐멘터리가 떠오른다. TV 화면에 그려진 곳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이 한창 열리고 있을 당시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신생국가 티모르 공화국으로 인구 130만이 살아가는 동티모르다. 동티모르에도 물질을 하며 살아가는 해녀들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먼 이국땅에도 해녀라는 직업이 있을 줄이야. 아마도 제주의 해녀처럼 모계사회의 길을 개척한 것일까. 수경을 쓴 동티모르 여성은 문어, 물고기, 갑각류 등을 잡아 또 그것을 말려 시장에 팔아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마치 제주 해녀를 마주한 느낌이다. 고무 잠수복이 아닌 평상복으로 수심이 낮은 곳을 활동하는 동티모르의 해녀지만 실력하나만큼은 뒤쳐지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상군 15m, 중군 8~10m, 하군 5~7m 의 깊이까지 잠수하는 3등급으로 나눠진 제주 해녀에 비해 잠수와 사냥 실력은 하군에 속해 있는 동티모르 해녀다. 그녀들의 실력을 비꼬는 건 절대 아니지만 상상해 봤다. 제주 해녀와 동티모르의 젊은 해녀가 맞붙는다면 승리의 우승컵은 누가 차지할게 될까? 실전처럼 시뮬레이션을 그렸지만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상상조차 무너지지 않는 제주 해녀의 위엄이 TV를 보는 내내 강제적인 체험을 선사했다.
"저~기 사진 좀 찍을게요. 얼굴은 안나오니까 안심하셔도 되셔요."
“늙은 할망 얼굴 사진을 찍어 뭐하게 마심. 주름만 가득한 게 말여“
무심하게 툭 말을 던져놓고 바다로 나가기 위해 준비에 여념이 없다. 꽉 끼는 모자를 쓰고 수경을 바닷물에 담가 김을 빼고,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만큼 무엇 하나 빠짐없이 준비에 철저히 신경을 써야한다.
해녀를 만나, 작은 렌즈안에 해녀가 보내온 삶의 시간을 담는 분주한 짧은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또다른 해녀들이 줄지어 바닷가로 전진해왔다. 어깨위엔 물지개를 메고 걸어오는 포스가 장군이다. 뭐~ 바다의 장군 이순신, 장보고도 해녀에게 일동 차렷이다.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꺼려진다. 대뜸 육두문자라도 날라올까 두렵다.
"소라 많이 따오세요.“
멸종되어 가는 북극곰처럼 시간이 지나면 해녀도 역사책속 사진으로만 보게 될지 모른다. 올레 17코스의 한수풀이란 해녀학교에서 해녀, 해남을 양성한다고 하지만 해녀의 일이란 만만찮다. 고된 노동을 견뎌야하며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곧 17세기부터 시작된 해녀의 일상이 눈앞에서 시작되려한다.
60대지만 이팔청춘, 수영 실력은 물개급이다. 웅성웅성 해녀 할망들의 수다소리에 방해될까, 가장 큰 이유는 ISFT 란 MBTI로 인해 자리를 떳지만 아쉬운 마음에 고개는 해녀들을 향한다. 인도로 올라오는 몇 초 한눈파는 사이 물장구를 치며 바다밑이로 사라져가는 해녀의 뒷꽁무니만 보인다. 해녀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언젠가 마라도에서 카메라를 잘못 들이댔다가 욕먹던 일이 덜컥 생각난다. 후다닥 가야 할 길을 청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