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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욱이 Dec 29. 2023

귤 카펫은 나의 무대, 셔터를 누르다

12/27.2017


겨울에는 곰이 3계절 동안 미모와 바꾼 몸매로 겨울잠을 자고 일어나듯 이불 밖으로 배꼼이 얼굴을 내밀고 오늘의 목적지를 생각했다. 생각만으로 기분이 들떠드니 겨드랑이 사이로 날개가 돋아 하늘을 날 것만 같다.

파도 위로 서핑을 타듯 찬바람에 한올 한올 날려 나부끼는 머리카락과 달리 아침 하늘은 어제와 같이 여전히 검게 물든 구름으로 하늘을 가득 메웠다. 다행이라치면 듬성듬성 구름 사이로 피어난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만족감뿐이다. 도심지를 가로질러 516도로 숲 터널을 만끽하며 자동차를 타고 1시간쯤을 달렸다. 제주에서 유일하다고 아니,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별천지다. 서귀포 성산읍 신천리의 귤 향기가 서서히 눈앞에 다가왔다. 벌써 오늘의 할 일, 목표를 다 끝낸 기분이 몸을 노곤하게 만든다.

도로를 가로질러 가느다란 나뭇가지 끝 퉁에 매달린 귤 하나. '나 먹고 싶지!' 종알종알 입을 놀리고,  바다를 벗 삼아 여행을 즐기는 여행자의 여유로움이 부러움이로, 살짝 싸움을 걸고 싶어지는 걸싸한 풍경이다. 울타리 입구를 지나 발을 들어놓는 순간 눈이 뜨악! 다가서면 열리는 자동문처럼 입이 쫘~악 벌어졌다. 알맹이가 아닌 난도질 당한 귤껍질. 쓰레기라 칭해도 될만한 관심밖의 귤껍질이지만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이런 모습을 마주할 수는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새콤달콤한 향기가 콧속을 파헤칠 것만 같은 풍경, 그러나 그 어디에도 향기를 맡을 수는 없다. 이미 맛과 향은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 식도를 타고 위장에 삼켜져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더 깊이 빠져들고 널려진 귤껍질이 그린 풍경으로 빨려 들어갔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귤껍질의 행렬을 따라 가고가도 끝이 보이지 않고, 내 손안 들린 카메라의 셔터만 누르고 누를 있을 뿐 어떠한 말과 생각도 할 수조차 없다. 보이지 않는 귤의 향기가 눈을 통해 시신경으로 퍼져 녹아들었다. 셔터를 누른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한적한 신천 목장의 귤천지는 사람들의 별천지로 복작복작 바뀔 분위기다.

어쩌다 함께 온 동료이자 동생의 얼굴 위로 수심이 점점 깊어져 갔다.

“승천아, 어떡할래! 사진만 찍고 후다닥 갈래?”

“그냥 슬렁슬렁 보고 가요. 급한 것도 없는데.”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데. 으윽~ 갑갑해”

복잡한 도심지에서 틀어박혀 살다 온 녀석이라 그럴까. 늘어나는 인파 속에서도 나와 다른 느긋한 여유가 느껴진다. “그래 사진이나 찍자.”

바다 절벽 앞, 겨울이 되면 ‘소’의 무리는 사라지고 귤껍질의 행렬이 이어지는 신천 목장. 오직 귤껍질을 널려 놓았을 뿐이지만 단순한 색의 유혹은 더욱 강렬하다. 남녀노소 연령제한 없는 신천 목장엔 노부부의 사랑이 녹고 파릇한 젊은 청춘의 이색 공간으로 귤껍질은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신천목장은 관광지이지만 또 다른 위험한 이름 사유지란 수갑이 채워져 있다. 목장 울타리를 지나며 어렴풋이 스친 간판의 글이 떠오른다.

“이곳은 관광의 목적이 아닌 사유지이며 살아가는 터전이니 경계선을 (귤껍질을 밟지 마시고) 넘어가지 말고 탐방로를 이용해주세요.”

주인 백, 경고마저 잊어버릴 만큼 눈은 멀고, 코끝에는 바다의 짠한 향기가 밀려오고 어느 순간 중독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방팔방 널린 노란 갑옷을 입은 귤껍질은 목장을 수놓은 작은 또 다른 귤꽃이다. 귤껍질 빠진 나와 동생은 절벽 아래로 난리부르스를 떠는 성난 파도마저 잊게 만든다. 너머너머 병풍이 되어주는 오름과 알록달록 카펫이 되어주는 귤껍질로 여기는 신랑 신부가 되는 결혼식장. 잠깐이지만 누구나 미녀가 되고 미남으로 자연이란 의사에게 무료 성형 수술을 받는다. 이영애, 김태희도 울고 갈 만큼 그녀들의 미모가 우월하게 빛났다.

바위에 부닥친 거친 파도가 짠 소금 스프레이를 뿌려댔지만, 주황색 얼굴을 내민 신천 목장의 귤껍질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멀리서 바라보기에는 아까운 자태, 목을 쓱 널려 귤껍질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더 아름답다는 풀꽃과 다르게 “이건 뭐지?” 의문이 툭하고 뇌리를 쳤다. 째려보듯 귤껍질을 바라보는 나를 향해 “형 뭐하고 있어요. 어~ 그게 말이야.” 귤껍질은 자세히 보아야 할 녀석이 아니라 뭉쳐서 보아야 매력은 배가 되는 듯하다. 목욕재개도 하지 않았는지 화려함 속에 먼지를 까맣게 뒤집어 썼다. 샤워를 했으면 하지만 선선한 바닷 바람에 따스한 열기에 말려가는 입장에서 위반되는 일이다.

신천 목장은 올레 3코스에 녹아 있는 이색적인 장소로 울타리 입구에서 목장을 빠져나가기까지 200여 미터쯤 거리의 목장인 만큼 크기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어떤 관점에 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이 더욱 눈을 사로잡는다. 나는 이쪽 너는 저쪽, 서로 다른 곳을 걷다가 다시 뭉친 동생과 나는 또다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 시작한다. 나에게 찾아온 유일한 동생이었기에 많은 사진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다. 하얀 잠바를 걸치고 검은 선글라스까지 주황색인 귤껍질과 색의 조합이 천생연분이다. 그렇게 시작된 셔터는 결국 동생이 두 손마저 드는 경우까지 다다랐다. 시간을 쫓아 장소를 옮기려는 찰나 귤껍질을 뒤집고 있는 아저씨 한 명. 하나, 둘 쌓아뒀던 귤껍질의 의문을 파헤칠 기회가 생겼다. 목까지 차오른 “아저씨 저기” 질문은 입안을 맴돌 뿐 멀리 떠나간 아저씨의 등만 바라볼 뿐이다. 승천이는 그런 모습이 한심한 듯 멀뚱히 서서 쳐다본다. 부끄러웠던 걸까. 솟구치는 피의 역동성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12월의 겨울이 찾아올 때면 신천 목장의 주인은 소나 말이 아닌 조각조각 잘린 귤껍질이 여행자들의 동반자다. 두 번째 코스를 찾아 이제 다시 조금 더 서쪽을 향해 달려간다.

“승천아 너 운전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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