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01. 06
10년 전의 금요일은 나에게 진정한 불금이었다. 밤이 되면 정신이 뚜렸이 깨어나고 밤샘을 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요즘들어선 몸도 마음도 지쳤다. 24시가 될쯤이면 신데렐라의 꿈이 사라질까 잠을 자야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잠을 쉬이 들지 못하고 끙끙되며 뒤척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까르르 웃으며 안부를 묻는 서울 아가씨 유정이다.
“오빠 잘 지내. 나 제주 내려 왔는데 내일 시간 있어.”
한마디로 같이 놀자는 얘기다. 시간이 없다면 만들어야 할 입장이다. “당연하지. 내일 어딜 가려고. “
“그러니까 어딜 가면 좋을까”
되레 질문을 되받아친다. 어느곳이던 다 좋지만 겨울의 묘미는 뭐니해도 하얀 눈이 내린 산이다.
“눈 되게 많이 내렸는데 영실 어때.” 전화기 너머 숨소리만 ‘쉐쉐’ 들린뿐 아무런 대답이 없다.
몇초가 지나 “우리가 말야. 둘다 다리가 좋지 않아서 산을 오르는 건 안되고 살쿰살쿰 걸을 수 있는 곳은 없을까?”
“사려니 숲길 어때! 삼나무도 있고 걷기 편하고 자연을 민끽하기에 최곤데.”
“그래 거기로 하지. 우린 내일 일출 보고 가면 12시쯤 될거야”
“일출 못 볼텐데”
다음날이 밝았다. 반복의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고, 그에 맞춰 하루 일정을 소화하기 위한 아침밥을 챙겨먹고 얼굴을 씻고 몸단장까지, 나갈 준비를 마쳤다.
나머지는 버스 시간에 맞혀 나가면 끝이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전화벨이 울린다.
“우리 일출 보고 들어오니 1시 좀 넘어야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겨울 숲의 태양은 빨리 퇴근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너무 늦는데… 시간이 모자라겠는데”
“안되려나? 그럼 오름이나 갈까.” 옆에서 주문을 외우듯 뜻밖에도 친숙한 안돌오름이란 말소리가 들려온다.
“그럴까. 어디서 볼까?” 몇번 가본 장소였고 풍경도 걷기에도 알맞은 장소로 딱이었다. 낚인 걸까? 잡은 걸까? 지금 쯤 안돌, 밧돌 오름이라면 바람에 춤을 추는 억새가 한창 이쁜 시기이다. 나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녀들을 모델로 삼아 두번쩨 직업인 사진에 몰두해볼까? 이게 왠 떡이냐.
“전에 언니가 송당에서 택시 타고 가봤는데 가깝데… 여기서 만나서 택시 타고 가자.”
덜컹거리는 버스에 올라 그녀들과 만날 송당리로 달리며 억새의꿈을 꾼다.
유쾌한 웃음과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그녀들과 첫 만남을 가진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감성적이며, 윤리와 도덕성을 가진 ISFP-A와 ISFJ-T 형으로 외향적, 내향적 성격인 나로선 1년 전 만남과 다름없는 그녀들의 수다가 반갑기도 어색스럽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곧 극복 할 것으로 판단되었고, 버스에서 만남까지 급박한 시간의 쉼을 가져보려 송당리에서 맛으로 어느정도 인정을 받는 대표적인 카페로 향한다. 그렇다고 별벌레나 둘의 플레이스 등과 같은 유명 체인점과 달리 한적하고 조용한 그런 곳이다.
친절한 사장님, 고급적인 원두와 커피의 향 모든게 만족스럽게 안정적인 쉼으로 1년 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버스를 타면 될까? 안돌 오름 입구까지의 거리는 3.9km, 그녀들과 나, 이동 시간과 비용을 계산해보니 택시가 어느모로 보나 정답에 가깝다. 주변을 살펴보아도 눈에 띄지 않는 택시, 어쩔 수 없이 폰을 꺼내 들어 택시 어플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택시 운전기사님의 유쾌하고도 재밌는 말 솜씨에 3.9km가 아닌 1km 안팎을 달려온 느낌이다.
어느새 노숙자 생활 쉼터에서 지낸다는 택시 기사님의 안내로 안돌 오름에 다다랐다. 셋은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고 한명의 나를 제외한 두명은 저질 체력. 짧은 거리지만 만만치 않은 오름의 가파름에 쉬었다 가기를 열 댓번, 그저께 내린 눈마저 녹아 질퍽한 오름길을 걸림돌에 간과했다. 힘들지만 촌촌히 한발 한발 내딛으며 30분의 시간을 소요하고 무사히 정상을 밟았다. 분화구는 동쪽으로 흘러내린 말발굽형 오름으로 앞쪽 능선의 좁다란 길목은 번잡했지만, 진달래 나무가 다음 봄꽃을 피우기 위해 겨울 눈을 피웠다. 곧 겨울 꽃망울이라도 피울 기세다. 봄이 찾아오기 전 바람에 이리저리 헝클어진 억새그들의 머리결은 야생의 기운이 그윽하다. “제목 : 야수와 미녀” 거친 억새의 손길은 미녀에게 천군만마 같은 존재로 그녀에게 전광으로 비친다. 그녀를 만나 본업을 찾은 억새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꾸불꾸불 오름길은 한라산의 판박이, 368.1m 의 작은 키에 한라산의 경관마저 빼다박았다. 오름 너머너머 한라산을 수놓은 안돌 오름의 풍경이 너무 환상적이라 밧돌오름에 대한 기대도 덩달아 부푼다. 한 걸음 가까워진 억새의 꿈이 가슴까지 벅차 올랐지만, 눈길에 널브러진 억새의 머리결에 미끄덩 넘어지고 만다. 억새의 마지막 발악이다.
허약한 체질은 여기저기 거친 억새의 반항에 몸을 가누지 못한다. 비틀비틀 밥 한 톨도 못먹은 듯 비실되는 그녀다. 밧돌오름은 어떻게 오를려나? 안돌 오름을 내려가 밧돌 오름까지 오르는데 기본적으로 30분 이상이 소비된다. 걱정에 걱정만 앞선다.
으그적 으그적 한발 뛰고, 두발 뛰며 두번째 밧돌 오름 공략에 너선다. 그녀들의 출진으로 넘어설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밧돌 오름도 말굽형으로 안돌오름과 흡사한 모양의 분화구를 가졌다. 동쪽 끝, 수평선 위로 우도와 성산 일출봉이 놓여 있고, 그 옆으로 동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랑쉬 오름의 유혹이다. 다음 목적지는 아끈 다랑쉬와 큰 다랑쉬일까? 오름의 군락지 동쪽 높은 오름, 안친오름, 용눈이 오름 등의 봉긋 솟은 멋스러움이 맛깔난다. 능선을 따라 억새가 아닌 제주 옛집 지붕의 재료인 “띠”인 “새”가 풍년이다. 반항조차 할 수 없는 기녀의 농락이다. 새가 춤추는 사이를 걸어 능선 끝에 선다.
정상에서의 모습과 다른 또 하나의 작은 풍경이 눈을 휘감는다. 하늘 끝에 맞닿은 억새의 끝에 선 그녀들은 바람과 춤을 춘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