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13코스
10:30분에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각보다 30분 일찍이 도착했다. 뭐~ 일정이 앞당겨졌다고 나쁜 건 없으니 안심이다.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저는 이제 저지문화회관 앞에 도착했습니다.” 며칠 전 함께하기로 한 물결이란 별명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아직 성별은 모르지만 별명도 여성스럽다. 기다리는 내내 기대감은 상승했고 예쁜 여자이길 바랐다. 까맣게 타는 속도 모르고 노란 잠바를 걸친 한 남성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제발 아니길. 지나쳐 가길. “오~ 신이시여.” 기대했던 마음은 와르르 무너졌고 상상 속의 그녀가 눈앞을 둥둥 떠다녔다.
맥이 빠졌다. “안녕하세요. 혹시 물결 님이 신가요.” 인사는 간단히, 남자끼리 나눌 말이 별로 없다. 눈 맞춤에 더 썰렁한 겨울이 되어 버렸다. 낯선 기운이 몸을 감쌌다. 그냥 갈 길이나 가자. 좁은 돌담길이 마주하는 올레길 골목길을 들어섰다. 삿갓을 쓰고 사랑을 나눴을 법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른다. 마치 언젠가 보았던 그런 희미한 기억의 그림이다. 귤밭의 달콤한 향기가 코를 향해 날려왔다. 끝물인 귤은 얼마나 맛있을까? 상상을 했을 뿐인데 입안에 침이 고인다. 귤밭 옆으로 작은 표지판 하나가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꾸벅 해왔다. 올레 13코스에서 첫 만남이자 시작 지점 저지오름을 가리켰다. 2007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 생명상 즉 대상을 받았다. 제주 오름의 시샘을 받을 만큼 유명세가 대단하다. 그만큼 마을 주민들의 자부심도 크게 느껴졌다. 오름의 모양이 새 주둥이 같다 하여 저지오름의 옛 이름은 닥모로(닥몰)를 본떠 닥몰 오름 새오름으로 불렀다. 올레 13코스를 걷기 전 저지오름의 비밀과 아름다움을 살짝 파헤쳐 볼 심산이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보기에도 숨이 턱 막히는 경사가 가로막았다. 하나, 둘, 셋… 60개쯤 되는 계단길이 뻗어있다. 처음부터 힘을 뺄 생각도 없었지만 다행히 계단의 끝도 눈에 보였다. 여정에 있어 올레 길이든 오름이던 쉬엄쉬엄 걷누 게 원칙을 가진 나였다. 조용히 불어오는 찬 바람의 공기를 깨고 함께 걷는 동지에게 말을 건넸다.
“전에도 이런 계단이 있었나요. 기억이 나질 않는데요.”
“그러게요. 저도 기억이...
“혹시 오늘 올레 13코스를 걷고 내일은 어딜 걸으시나요?”
“요즘 많이 걸었더니 연골이 아파서 상황을 봐야 할 것 같아요.”
남자 둘이 나눌 대화의 주제가 그리 많지 않다. 어색한 기운만 맴돌고 “연골”이란 단어까지 나오게 되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단어다. 젊음의 패기가 피부로 와 닿았지만 연골이 부실하다니 안타까웠다. 둘은 결국 대화가 끊기고 가파른 오름길로 올랐다. 마라톤을 한 것 같은 헐떡거림에 피부는 땀을 쏟아냈다. 헉헉~ 나도 모르게 민망한 소리가 나왔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모른 척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찍는 척을 한다. 60개정도의 계단을 오르니 약 900m의 평탄한 둘레길을 만났다. 걷는사이 뜨겁게 끓어오르던 몸도 점차 식어 싸늘한 바람이 머릿결로 지나갔다. 쏟아붓던 땀은 마르고 추위에 정신이 더욱 맑아졌다. 눈은 동그라지고 그제야 주변이 조금씩 보였다. 빽빽이 늘어선 나무의 행렬은 고생했다며 위로와 맑은 공기를 머리 위로 뱉어냈다. 여기서 멈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유혹에 빠질 수 없다. '난 내가 싫어' 해발은 230m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벗어나기 힘든 아름다운 매력을 소유한 저지오름. 단, 농사를 짓고 살던 분화구가 있는 정상까지 오름길은 만만찮다. 아래로 내려갈 때쯤 만난 정상으로의 길. 끝없이 뻗은 계단을 바라보니 머리는 멍해졌고 출발 전부터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정상을 밟고 싶었지만, 산책만을 고집하게 이유다. 저지오름을 둘러보는 시간은 대략 2시간. 올레 13코스를 걷는 데 있어 허락되지 않았다. 올레 13코스는 15.9km로 용수포구에서 저지오름까지의 여정이다. 하지만 난 역주행을 택했다. 오름을 오르고 들판의 꼬불꼬불 이어진 길을 따라 바다로 내지르는 행로다.
몇 미터 되진 않는 길을 올랐지만 내려가는 게 인지상정. 빡빡 쫴오던 근육이 느슨하게 풀려왔다. 부글부글 끓던 몸도 쌩쌩 불어오던 찬바람에 하얀 서리가 내렸다. 2월은 봄이 아닌 틀림없는 겨울이다. 연골이 아프다던 물결 씨는 힘 빠진 나의 두 다리가 쉬는 동안 쌩하니 옆을 지나쳐갔다. 내리막인데 괜찮을까? 첫 만남이지만 괜히 걱정이 앞섰다. 걷다가 아파도 낭패다. 뒤를 따라 쫓아갔지만, 오랜만의 등산에 다리가 덜덜 떨려온다. 허벅지에 힘을 꽉 주며 터벅터벅 잰걸음으로 쫓아갔다. 아픈 사람치곤 만만찮은 걸음 속도다. 다행인 것은 숨 가쁜 고난은 끝나고, 이제부턴 낭만을 즐길 평탄한 길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잠시 힘들었을지 모를 저지오름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다. 그렇지만 연신 고개는 저지오름이 있는 뒤로 돌아갔다. 속 빈 강정처럼 허전하고 아쉬움이 남는 게 시원치만 않다. 무슨 까닭일까? 낭만을 느껴보지 못해서, 보지 못한 풍경에? 생각은 많아지는데 묘가 하나, 둘 공동묘지가 모습을 보였다. 이유가 다른 고개를 움직임. 눈으로 봐서 1,000평은 넘어 보이는 큰 묘지 터에 놀라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많은 묘에 당황스럽고 겁이 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발만 동동거렸다. 그런 반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걸어가는 물결 씨가 신기했다. 묘 앞에서 전혀 졸지 않는 당당함이 부럽게 느껴졌다. 후다닥 물결 씨의 등 뒤까지 따라붙고야 무섭던 겁쟁이의 마음은 안정을 찾았다. 묘지 앞에 서면 죽음이 늘 무섭고 슬프다. 조상의 묘 이전을 한다고 파헤쳐놓은 모습은 더욱더 싸늘하게 다가온다. 오름 아래 묘지를 만날 때면 무섭기도 하지만 마음 깊숙한 어딘가 숙연해져 오기도 했다. 앞서가는 물결 씨의 모습을 살핀 후 몰래 영혼의 평온함을 빌며 묵념을 한차례 올렸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봉긋 올라온 묘조차 기생화산 오름의 자식으로만 보였다. 한라산의 자식이 오름인 것처럼 말이다.
섬이란 좁은 공간에서 살아감에 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렇다고 어디에 유기할 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집 옆이나 밭 가운데 무덤이 있기도 하다. 어째 생각하면 가족애가 끈끈했을 수도 있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들길의 지평선은 끝없이 이어졌고, 그 길은 곧 낭만의 시작되는 시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