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불꼬불 낭만의 길(올레 13코스 2)

올레 13코스 총 3편

by 병욱이

꼬불꼬불 낭만의 길


아직 봄이 오려면 멀었지만, 들판에는 벌써 봄이 내려앉아 축제를 열었다. 밭에는 무가 자랐고 담벼락 아래로 하얀 동백꽃 선녀가 내려왔다. 봄과 겨울의 중간기로에 선 맞선이다. 차갑게 불어오던 겨울바람마저도 낭만적으로 바뀌었다. 동백꽃의 꽃말은 “진실한 사랑, 그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짝꿍에게 고백할 때 장미꽃이 아닌 특별한 동백꽃을 한 아름 안겨줘도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난다. “나에게도 사랑이? 저는 아닙니다.” 빨간 동백보다 보기 드문 흰 동백꽃을 만났다는 건 행운을 맞을 일이다. 아니 벌써 올레 13코스의 사랑비가 벌써 행운을 맞았다.

비밀을 다 캐지 못한 오름을 내려와 마주한 오밀조밀한 밭담 길. 드센 바람은 돌구멍을 들락날락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뒷동산 아리랑길이란다. 돌담의 연주에 덩실덩실 몸을 실었다. 바람 따라 나댔더니 땀이 나고 두꺼운 잠바가 거추장스러워졌다. 꼼지락 움직였다 치더라도 추운 겨울날 말도 되지 않은 땀이다. 그러다가도 잠시 방심하는 사이 들판을 훑고 추위는 살갗은 파고들어 왔다. 바람 이 녀석 미쳤다. 아무것도 모르고 죽자 살자 덤벼든다. “네가 날 얕봐” 하며 달려드는 분위기다. 뽀송뽀송한 깃털이 들어가 있고 빗방울도 튀겨내는 발수기능에 바람도 막는 방풍 기능이 장착된 잠바다. 게임이 될 리 없다. 바람은 덤벼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혼자 힘들 뿐 뒤꽁무니나 숨기고 아서라. 걷고 걸어도 잠깐은 사람 냄새, 마을을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초록으로 뒤덮인 들판 위에 하얀 집 비닐하우스만이 가득하다. 조용한 밭 담길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왔다 갔다 술래잡기를 했다. 장난만 일삼는 겨울의 행패만 빼면 평탄한 길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로웠다.

의자왕이 있는 “낙천리 의자 마을”


멍하니 돌담에 푹 빠져 둘은 길을 잘못 들어서고 말았다. 그곳이 어딘지도 모를 엇갈렸던 갈림길로 되돌아가야 했다. 서로의 뚱해진 표정을 바라보며 머쓱해져 웃음만 지었다. 완주 거리 15.9km 중 절반 정도인 낙천리 의자 마을이 가까웠다. 지금의 속도로 간다면 어림잡아 30분이 도착 예정이다. 잘 포장된 농로를 따라 걷다가도 순간 숲속으로 들어갔고 다시 좁다란 돌담길을 마주했다. 낙천리 의자 마을로 이어진 밭담 너머 무와 파가 무럭무럭 자랐다. 특히 무 잎사귀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음을 깨달았다. 입안에 가득 고인 침은 꿀꺽 삼켰다. 서서히 배가 고파왔고 어릴 적 무심코 했던 수박 서리가 기억났다. 무 하나를 뽑아 치아로 무를 갉아 입으로 쏙~ 아삭아삭 짭조름한 무맛이 상상됐다. 제주 무는 특히 맛있는데 2020년은 서리를 허락할 리 없다. 드디어 낙천리 아홉굿 마을에 도착했다. 아홉 굿이란 아홉 개의 연못을 뜻하는 제주어다. 또한, “nine good”으로 Good이란 좋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외국어 표기도 꽤 괜찮아 보인다. 허기를 채우기 전 수많은 의자가 눈을 유혹했다. 의자 공원의 의자는 1,000개 정도이며, 의자 각각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름 하나하나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1,000개의 의자 중 하나를 잡고 가져온 팥빵을 뜯어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터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이라고 칭하고 싶을 정도다. 2분만 끝난 식사 시간. 배를 채우니 의자 공원이 새롭게 다시 보였다. 그중에 높이가 30m쯤 되는 것으로 수많은 의자의 조합으로 만든 의자다. 앉을 수는 없지만 크다는 이유만으로 낙천 의자 공원을 위상을 높였다. 시간과 동행이 허락한다면 아홉 개의 연못을 찾아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안다. 다시 마을길을 따라나섰다. 의자 공원과 연못을 비롯해 밭담 너머 소담스러운 풍경이 살랑살랑 춤을 췄다. 13코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올레길은 코스마다 별다른 특별함이 특별나다. 옆을 밝혀주는 동행을 만나고 밭담의 길 안내에 외로움 걸음도 웃음이 되어 피었다.

떠나는 마음을 담고


20분간의 쉼을 가지고 낙천 의자 공원을 떠나야 했다. 말만 쉬었지 실상은 구석구석 돌아다니느라 제대로 다리 한번 펴지도 못했다. 쉬진 못했지만 의자라는 소재로 만들어 놓은 볼거리에 힘을 얻었다. 올레 13코스 마지막 용수리 포구까지 뛰어갈 수도 있을 만큼 힘이 넘쳤다. 중간 점검 차 지도를 펼쳤다. 여기서부터 용수리 포구까지 거리는 9km다. 뛴다는 것은 무리 꼬닥꼬닥 이어진 밭길을 지나 4개의 숲길을 만날 준비를 했다. 느슨해진 신발 끈을 단단히 묶고, 흐트러진 옷을 주섬주섬 바지 속으로 넣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물결씨가 보이지 않는다. 먼저 출발한 것이다. 말도 없이 혼자 쌩하고 가다니 삐침이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운함이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왔다. 급히 뒤따랐지만 얼마안가 두 눈에 잡혔다.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포착. 그건 그토록 보고 싶었던 9개의 연못 중 하나였다. 작은 조약돌을 모아 큰 의자 하나가 연못 가운데 세워져 있다. 특이하게 조성된 연못 나머지 8개의 연못이 궁금했다. 의자 하나에 뭉클한 감성이 깨어났다. 쳐다만 보고 있을 수는 없어 손전화기를 꺼내어 연발로 찍어댔다. 발목을 자꾸 잡는 풍경에 홀딱 빠져 아홉굿 마을을 벗어나는데 오래 걸렸다. 이젠 가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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