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 쪽빛 바다, 뭐로 가던 서울만 가면된다[1부]

올레 14의 반코스

by 병욱이

갈팡질팡 두뇌의 사투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라니 말도 안 된다. 무려 392.7km란 거리를 어느 세월에 걸을 수 있단 말인가.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인 성격에 속 터질지 모른다. 걷다가 1년이 훌쩍 넘는 건 기본일 테고, 세월아 네월아 할 겨를도 없거니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어떤 방식으로 가든 서울만 가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다고 꼭 부당한 방법을 택하란 말은 아니다.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때아니게 하늘은 가을이 온 마냥 새파랗게 물들었고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바람이 움직이는 데로 흘러갔다. 최면이라도 거는 듯 움직이는 환한 밖의 세상은 지하 동굴에서 지내던 박쥐의 모험과 같았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가 덜컥 겁나지만 움트고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버스를 올라타기 전. 머릿속은 온갖 생각이 밀려와 멀미가 일어날 지경이다. 행복한 고민이라고 해야 할까? 방향을 못 잡고 이리저리 두뇌의 발길에 차였다. 버스 터미널에 들어서고 나서 서쪽으로 향하기로 맘 길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라지만 뽕 갈 것 같은 날씨에 선택이란 쉽지 않은 결정이다.

버스에 오르고 난 뒤에도 여전히 마음은 갈필을 잡지 못하고 전화기만 만지작거린다. 그럼 어딜 시작점으로 찍을까. 지금 올레 17코스 시작점으로 간다는 건 무리였기에 중간지점으로 월령리가 그나마 적합했다. 모든 게 정리된 듯했지만,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생각은 벼랑 끝에 놓인다. 사람 마음이란 게 이렇게 변덕이 죽 끓듯 변하는지 모를 심사다.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한 번 더 장소를 변경할 결심에 이른다. 잘 짜놓은 2박 3일의 여행길에서도 변수가 생기기 마련. 그만큼 더 짧은 하루를 더 우아하게 보내려면 이 정도의 고민은 필수 조건이다.

많은 생각만큼 버스의 좌석도 이미 만원 동이 났다. 버스 안은 점점 서 있을 공간마저 비좁아졌다. 피부 좋고 혈기왕성한 젊은 애들만 타는 것이였다면 다행이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 엉거주춤 걸음걸이가 불편한 할아버지 등 다수가 연로한 어르신이다. 두 번째 맞은 고비가 해결되기도 전, 엉덩이를 계속 푹신한 의자에 붙이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 앉으세요.”

“괜찮아요.”

“전 괜찮습니다.”

“어디 간.”

아직 결정된 상황이 없기에 어림잡아 이야기해야 했다. “아~ 저는 월령리요.”

“아직 한참 남았는데... 가방도 무거워 보이고 가방 이리줍서”

“괜찮아요.”

할머니라 비켜드린 것뿐인데, 당사자로선 ‘나 아직 젊은데 이런 대접은...’ 그런 생각을 가졌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로부터 40분이란 시간이 다시 지나고 버스에서 내렸다.



태양의 역습


시원한 버스 에어컨을 쐬다 나온 밖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습기란 놈이 몸을 휘감고 태양은 하늘과 지상에 불을 지폈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태양의 뜨거움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팔과 목을 향해 쏟아붓는 태양의 열기에 피부는 따갑고 쉼은 턱까지 올라왔다. 시작 초반부터 태양에게 완패를 당한 기분이다. 망연자실한 채 한숨만 쉬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혼전한 정신을 부여잡고 덩그러니 떨궈진 장소에서 벗어나 바닷길로 향한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반짝반짝 빛을 발했고, 깊고 조용한 침묵은 더위에 지친 숨소리만 헐떡거렸다. 주변의 상황을 둘러본 후 답답했던 마스크를 벗고 숨을 크게 들이 쉰다. 1년 반년이란 시간 동안 애타게 그리워했던 여러 종류의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어 잠자던 후각을 다시 일깨웠다. 짠 바다 냄새, 바람을 타고 날라 온 야리끼리 한 냄새, 그리고 작은 풀잎의 향기마저 상큼하다.

영화에서 볼 법한 지구의 암담한 미래가 그려진 장면이 떠오른다. 숨을 쉬기 위해 방독면을 써야 하고 총을 들고 누군가로부터 먹을 것을 약탈해야만 살 수 있다. 아직 거기까지 지구의 상태는 심각하지 않지만, 곧 앞으로의 일상이 될까 두렵다.


코로나 그건 비극이지만, 때론 휴식이다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고 마스크를 쓴 후로 약 580여일만의 일이다. 어느 인류학자가 말하길 이젠 코로나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말 한마디에 소름이 끼쳐 부들부들 몸이 떨려온다. 갑갑하고 덥다고 짜증을 부릴 여유가 없다. 지금을 시간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남은 거리는 대략 절반 9km쯤이다. 자그마치 4개의 포구와 2개의 해수욕장을 지나야 하며 그 길은 바다와 나 공생의 시간이다. 그러기에 중간중간 많고 많은 에피소드가 탄생하길 기대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나뿐이었을까? 얼마 가지 않아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장면을 목격한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변화무쌍했을 날씨가 잠잠하다. 해변 돌 틈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난 안중에도 없다는 듯 등대 아래 그늘에서 눈을 붙이는 아저씨.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흘러가는 구름처럼 평화로움 그 자체다. 잔잔히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는 바람, 파도, 새들의 지저귐에 맞춰 조화로운 연주를 시작한다. 쿨쿨 아저씨의 자장가인 듯 부러움이 살금살금 마음을 파고든다. 서로 같은 장소 다른 모습이지만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한 나와 다른 세계는 모순을 일으킨다.

바다 가운데 섬 속의 작은 섬 비양도가 작은 얼굴을 드러낸다. 바다를 맞이하게 된 후 비양도를 눈에서 버릴 수 없게 되었다. 마치 자연과 공생하는 작은 벌레가 된 기분이다. 염소로 인해 붉게 이마를 보였던 비양봉의 머리도 푸르게 초록 잎으로 여름물을 들였다. 자그마치 2년의 세월이 흐르고야 본연의 젊음을 찾았다. 올레 14코스에서 유일하게 바라볼 수 있는 비양도는 협재리에서 바닷길로 2km의 거리다. 해안선의 길이가 3.15km밖에 안 되며 208명의 인구가 살아가는 작은 화산섬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작은 고추가 맵듯 작은 비양도 유혹의 손짓에 입맛을 다신다. 아마 목적지인 끝에 다다라서 모습을 감출 것이다.


섬에서 태어나 바람이 되다


에메랄드빛을 뽐내는 바다가 서서히 눈앞에 마법을 부렸다. 자랑거리라도 될까 싶지만, 족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환상을 선사한다.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바다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를 보게 된다. 우도에서 발행되는 ‘달그리안’란 작은 신문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작년 가을호라 기억된다. 김석린 진사를 기념하기 위해 발표된 “섬에서 태어나 바람이 되다.” 짧은 글 한 줄에 제주 도민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듯 가슴을 쿵 내리쳤다. 지금도 바다는 그렇다. 아름다운 외모를 뽐내고 있지만 정작 바다란 커다란 삶이라 말해왔다.

태양을 여전히 따갑고 시원해야 할 바닷물을 미지근하게 데웠다. 8월의 끝이 여름의 시작임을 알렸다. 더위를 먹은 걸까.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토해내지 못하고 몸은 주체하기 힘들다. 벌써 지쳐버리건 아닐 텐데 몸 상태가 야리꾸리하다. 바다를 주무대로 삼는 올레 14코스에서 휴식을 취할 마땅한 그늘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무작정 건물안으로 들어가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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