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5코스
방 안의 공기는 불알이 쪼그려들 만큼 겨울이 찾아왔다. 2주간의 방콕 생활을 접어야 할 때이다. 겨울 속 또 다른 얼굴, 커튼을 젖히고 창밖으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볕은 색다른 봄이 도래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은 곧 개나리꽃을 피울 것만 같다. 들썩이는 심장, 몸 깊은 곳에서 들끓어 오르는 열정을 더 가둬두기에는 무리다. 가방에 물건을 때려 넣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창문 안의 세상과 엄연히 다른 공기의 밀도가 얼굴 위로 내려앉는다. 봄이 아닌 “차가움” 겨울이 오고 있다는 신호다. 깜빡 졸다 지나칠 뻔한 올레 5코스의 시작점 남원 포구. 구사일생으로 잠에서 깬 두뇌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나의 두뇌야 고맙다.” 태양은 3분의 2쯤 하늘을 가로질러 오후 1시다. 배짱을 부려도 너무 부렸다. 이대로라면 솔직히 13.5km의 완주는 힘들게 뻔하다. 어찌 되었든 칼을 뽑고 올레 5코스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가야 한다. 오직 믿을만한 건 나의 두 다리뿐임을 알고 있다. ‘폼생폼사’ 시작부터 맥이 빠져 헬렐레 모양 빠진다. 조용한 아스팔트 위, 그나마 요란스러운 파도 소리에 멍해진 정신을 차리니 눈앞은 경기를 일으키기 직전이다. 아스팔트 도로를 점령한 감귤이 실린 경운기와 트럭이 줄을 섰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감귤 가격 책정으로 시위라도 벌이는 걸까? 그럼, 사람은 어디에 모여 있을까? 찾아볼까? 답답함이 단전에서 부글부글 끓지만 속수무책이다.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고 궁금증만 증폭시킨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지만 흔한 풍경이 아닌 만큼 감귤의 동태에 다시 발길을 되돌렸다. 촉박한 시간에 불이 나게 달려도 안 될 판국에 뉘엿뉘엿 달팽이 걸음이다. “할아버지 저 감귤은 왜 저기에 있는 건가요.” “아~ 저거 마심. 배로 싣고 갈 거.” “네에~” “배로 싣고 팔러 간다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감귤에 혼자 한 편의 소설을 썼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난다. 1%만큼의 기대도 못 미쳤지만, 궁금증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었다. 신박 날 구경거리가 사라졌다.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흥분은 가라앉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13.4km란 숙제가 남았다. 포기하지 말라며 10km 밖, 섶섬의 그림자가 발목을 움켜잡는다. 그런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걸까? 쓸쓸한 마음을 느낀 바닷바람이 머릿결을 쓰다듬는다. 한참을 걸어 겨우 벗어나 아스팔트 길. 빼어난 경관을 보여준다는 간세 안내판에 적힌 글귀를 믿고 큰엉 해안 숲길을 맞닥뜨렸다. 겹겹이 서로의 손을 맞잡은 나무의 어깨동무는 살아있는 동굴이다. 나무 그늘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의 발악은 쌀쌀한 아침의 기억에 벼락같은 뜨거움을 뿌렸다. 이마를 적셔오는 땀방울, 나무가 내뱉는 향기에 파리만 윙윙 꼬일 뿐 개떡 같은 날씨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지상은 찬 공기가 가득하다. 10월 말쯤 정장과 코드를 입고 한라산을 올랐던 선배처럼 하나, 둘 옷을 벗어야 할까? 파란 얼굴을 드러낸 하늘, 뜨거운 태양은 겨울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새가 지저귀고 덩굴과 나무는 서로 엉켜있는 큰엉은 북위 0° 0′ 서경 70° 3′의 아마존으로 작은 아마존 밀림이다. 한여름의 푹푹 찌는 열기가 몸을 지배했고 두꺼운 옷은 민폐만 끼치는 불편한 존재로 전락했다. 옷, 땀, 태양, 추위와 실랑이를 벌이던 사이 걷는 재미와 맛에 잠시 잊어버렸던 궁금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모 드라마에서 “○△□” 동그라미, 세모, 네모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오징어 게임을 능가할 의문의 글귀다. “큰엉”이란 글귀에 특별한 비밀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궁금함에 스쳐 지나가는 글자로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난 셜록홈즈는 아니지만, 답을 찾고 비밀을 파헤쳐야 직성이 풀렸다. 가던 길을 멈춰 서 지식의 바다 인터넷을 뒤졌다. 단서 하나 없었지만 큰엉이란 글자 하나만으로도 정보의 바다에선 쉽게 해답을 찾았다. “큰엉”은 제주어로 절벽 위의 큰 바위 언덕을 뜻했다. 얼핏 제주어일 것이라 짐작했지만, 제주어는 접할수록 알 수 없는 블랙홀이다.
해안 숲길을 걷는 사이 나무를 비집고 톡톡 터트린 햇살의 전망에 매혹되고 만다. 카멜레온처럼 갯바위와 동화된 낚시꾼은 햇살이 나은 다이아몬드를 낚고, 파도를 감싸 안은 까만 기암절벽의 위풍당당한 풍경에 자연의 감동을 느꼈다. 햇살이 인도하는 샛길을 따라 바위 절벽 위로 향했다. 작은 풍채의 노란 야생국화와 털머위 꽃은 11월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줬다. 인당수에 빠졌던 심청이는 돌아왔을까? 심청이를 만나지 못해도 감겨있던 심 봉사의 눈이 번쩍 떠질 풍경이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풍경은 눈앞에 있지만, 어떤 이도 나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 아무 쓸모없는 향기다. 그건 코로나가 만들어낸 불신 때문이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한 쌍의 남과 여의 종알거리는 목소리에 귀가 솔깃했다. 이미 바닷바람에 실려 온 꿀단지의 달달함이 퍼지고 난 후다. 손에는 삼각대에 끼운 스마트폰이 들려 있고, 목에는 즉석카메라 폴라로이드 사진기가 걸렸다. 절벽 난간에 선 그들에겐 알콩달콩 사랑이 무르익어갔지만, 나의 눈에 포착된 한 쌍의 연인은 한낱 맛있는 먹잇감에 불과했다. 이 순간을 놓치면 앞으로 입안의 거미줄을 제거할 방법이 없음을 확신했다.
“어~ 동굴 찾고 있나요.” 즉각적인 화답의 반응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네에...” 시큰둥한 반응이다. 그렸던 그림은 이게 아닌데 시원치 않다. 호의를 베풀어주려 했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표정이다. 차라리 입안에 단내를 삼키겠노라 뒤돌아 가버리려는 찰나 졸래졸래 따라오는 발걸음이 감지된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심정으로 한 번 더 힘을 실어 말을 걸었다. 사실은 올레 5코스의 초반이지만 대화의 목마름에 이미 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여기서 좀 가면 큰엉이란 비석이 있는 그 근처에 동굴이 있어요.” 몇 달 전 고생 끝에 찾아낸 큰엉 동굴을 알았기에 던질 수 있었던 대답이다. 대화는 으레 묻는 대화로 이어졌다.
“어디서 오셨어요. 혹시 부산?”
“대구에서 왔어요.” “아~ 말투가 너무 비슷해서...”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이를 모면하기 위해 입은 방정맞게 움직였다. 무슨 말을 이어가지?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긴장감에 두근두근 심장의 박동만 울렸다. 빨리 뛰는 심장 박동만큼 걸음은 조금씩 빨라져 910m쯤 되는 큰엉의 산책길이 끝나갈 때쯤이다. 길을 막고 늘어선 무리가 무언가에 열중했다. 큰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나무의 마술쇼로 한반도 지형을 담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들에게 늘 당했던 나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그들의 즐거움이 탐탁할 리가 없다. 서둘렀던 발걸음의 속도를 5분의 3으로 줄였고 숨겨왔던 복수의 칼날을 뽑았다. 1. 여유만만한 걸음걸이로 잠시 멈춰서 한반도 지형을 바라본다. 2. 나 또한 한반도 모양으로 묘한 조화를 부리는 나무를 카메라에 담는다. 그렇게 1초, 2초... 발걸음이 멈춘 나에게 다른 방향을 제시하듯 연인의 발걸음은 뛸 듯 빨라졌다.
“왜 그렇게 서둘러요. 천천히 가도 돼요.”
자신들이 경험을 토대로 한 답답함에서 나온 행동일까? 작은 배려심의 이해일까? 복수는 작은 배려로 전환되고 어쩔 수 없이 앞서가는 연인을 뒤쫓았다.
“여기 바위를 밟고 내려가면 돼요.” 근심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여길 어떻게 내려가요?” 그냥 내려가면 되는데 못 내려갈 이유라도 있는 걸까? 다리만 멀쩡하면 초등학생도 잘만 내려갈 곳이다. 그런 자신감은 나에게만 존재했다.
“재밌는 시간 보내고, 혹시 연락처 주면 가볼 만한 곳 알려줄게요. 이름이?”
“박대훈이요”
“아니 배꼽 할 때 ‘박배훈’입니다.”
옆에 서 있던 여자 친구가 웃음을 짓는다. 늘 겪는 일인 듯 보였다.
“혹시 궁금한 점 있으면 연락해요.”
큰엉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자연스레 눈은 시계로 돌려졌고, 시곗바늘은 1시 50분을 가리켰다. 한라산이 내뱉은 검은 현무암 파편을 지나 또 해안 숲길을 빠져나왔다. 울퉁불퉁 돌길을 걷고 만남의 즐거움에 무리한 탓일까. 이런 무릎 연골이 욱신거리는 것이 이상이 생겼다. 한동안 집에서 머물던 몸뚱어리는 삐꺽 되었다. 13.4km에서 겨우 2km쯤의 구간이다. 더 걸을 수 있을까. 고민에 빠져있을 무렵, 고난은 끝을 맺고 반반하게 닦인 시멘트 길로 고난은 끝을 맺고 평탄한 길로 들어섰다. 무릎을 잠시 쉬었고 눈앞의 뻥 뚫린 시야에 나도 모르게 담겼던 답답한 마음이 해소되었다. 뜨거운 여름날 아이들의 수영장이 돼줬던 태웃개와 펜션 오라 제주를 지날 무렵, 그때 마침 들려오는 달달한 여인의 목소리. “영희 아빠 밥 먹고 낚시해” 그녀의 목소리에 귀가 쫑긋 기운다. 새파란 바다도 잊은 채 눈동자는 30m 앞에 놓인 테이블을 뚫어지라 쳐다본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의 음향에 두 눈과 코, 입은 백기를 들고 만다. 입안은 침으로 홍수가 일었고 허기에(가 밀려오는 차에) 더욱 활발해진 위장의 소동이 벌어졌다. ‘꾸르륵꾸르륵’ ‘뽀~옹’ 방귀까지 소란스럽게 야단법석을 떤다. 생리적인 현상이지만 가히 두뇌의 계략이다. 가방을 뒤져 일말의 희망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현실은 착잡하다. 초코바 하나 없는 가방은 먼지만 날렸다. 고기의 만찬을 바라보며 가져온 생수만 ‘벌컥벌컥’ 마시며 영양가 없는 배를 채웠다. 길 바깥쪽 작은 공터가 그저 한탄스럽다.
배고픔이 잊힐까? 발걸음에 모터 엔진을 달고 가속페달을 밟았다. 얌전하던 심장이 펌프질로 후끈 달아오른다. 이제 남은 건 아우토반뿐이다. 시동을 걸려는 동시에 ‘쿵쿵’ 또 다른 하나의 소리에 반응하는 귀, 이번엔 또 무엇이 나를 괴롭힐지 생각하는 것조차 어지럽다. 더욱이 항간에 떠돌던 들개의 발걸음은 아니다. 몇 미터 못가 소리의 정체가 드러났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위미 수산 물 펌프의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지만 허망한 생각에 빠지다니 남들이 볼까 무섭다. 그럭저럭 평탄한 길로 들어섰다지만 편안한 것도 아니다. 행인도 없는 길목엔 바람에 하늘거리는 억새의 춤사위의 풍경이 쓸쓸한 외로움을 그렸다. 그나마 마스크를 벗을 수 있기에 코와 폐만 호사를 누렸다. 무성한 어깨가 축 처져 땅바닥에 닿으려고 할 때쯤 무성한 야자수 너머 쾌락이 도사렸다.
올레 5코스 4.2km 지점인 국립수산과학원 앞, 허름한 외관과 스산한 분위기는 건물이 부도가 났음을 직시하는 모양이다. 잠시 아우토반을 접고 올레 5코스에 생각지도 못한 스릴을 맛볼 참이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몸은 스리슬쩍 방향을 비튼다. 불법행위는 아니지만, 혹시 무단침입이란 죄목으로 기소되지 않기만 바랬다. 방금 입구를 대처할 기둥 하나를 지났을 뿐이다. 으스스한 기운에 몸의 털이 쭈뼛쭈뼛 서고 공기의 질은 1월의 한파를 몰고 왔다. 오싹한 기온이 맴돌지만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한 발, 한 발 전진하며 내부의 깊숙한 곳까지 파헤쳤다. 살았던 흔적 온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용지물이다. 겉모양은 비록 모양을 갖췄지만 역시 내부는 그렇지 못하다. 허파를 쪼여오는 숨결에 심장마저 미친 듯 날뛰며 거칠어졌다.
“악~” 나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왔다. 폐허를 집 삼아 지내는 고양이 놈이다. 불씨를 지핀 고양이 녀석으로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발가락 끝에서 동체의 시신경에 이른 1,000개의 감각은 여길 당장 벗어나야 한다며 경고를 보내왔다. 등줄기를 따라 흐른 땀으로 옷은 흥건했지만, 지루함에 흐느적거리던 몸은 근육을 탄탄하게 쪼이며 생기를 되찾았다.
80%가량이 충전된 몸, 꺼진 엔진을 켜 다시 아우토반의 발동을 걸어야 할 때다.
근데 “배훈 씨는 지금 어디쯤이려나. 서쪽으로 간다고 했는데...”
파랗게 멍든 바다와 노랗게 핀 야생국화와 걷다 노란 귤밭을 만났다. 손만 살짝 뻗으면 껍질을 벗긴 귤을 입안에 쏙, 그렇지만 썩 기분 좋게 먹혀줄 감귤이 아니다. 연신 반복되는 일상처럼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주위를 둘러보지만, 편의점 하나 없는 깡촌이다. 국립수산과학원에서 휠체어 구간으로 진입, 편의점을 들러 배라도 채워야 했지만 이미 떠난 버스다.
겨울로 들어서는 12월의 위미리 동백길은 들어섰지만 위장은 자꾸만 "꾸르륵 꼬르륵" 시위에 열성이다. 달래도 여간 말을 듣지 않는다. 조만간 귤향이라도 느끼게 해 줘야 한다.
동백꽃이 불게 물든다는 소문은 서울까지 퍼졌을까? 50~60대로 보이는 아저씨의 무리가 헛걸음을 친다. 위미리 동백군락지는 애기 동백꽃으로 1월이 되어야만 했다.
"아저씨 여긴 아직 안되고요. 여기서 1,2km 떨어진 곳에 동백 군락지가 있으니 가보셔요. 대신 입장료가 있습니다."
"아~ 그래요. 어느 쪽으로 가면 되나요."
"큰길로 나가셔서 조금만 가면 됩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중중년 아저씨들이 단합대회라도 개최하는 걸까? 따라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 앞까지 올라왔다. 그렇지만 걷는이가 자동차를 따라잡을리가 만무하다. 와랑와랑 카페를 지나 200m 정도의 올레 5코스 위미 동백군락지의 기운은 짧지만 강렬하다. 이미 하늘을 향해 붉게 물든 꽃잎이 몇몇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내가 겨울의 여왕이다며 위세를 뜬다.' 다른일에 정신이 없던 두뇌와 다르게 온전히 위장은 시위를 계속 이어갔다. 그 찰나 올레 5코스의 중간 스탬프가 있는 파란 간세 옆, 빨간 잠바를 걸친 할머니가 유독 시선을 빼앗는다.
-올레 5코스 2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