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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Jun 13. 2021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로맹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써서 작가당 한 번만 탈 수 있다는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공쿠르 상을 2번 탄 유일한 인물이다. 문단의 부조리를 조롱하기 위해서였다는 썰이 있지만 완벽하게 사람들을 속였다는 것이 놀랍다.




로자 아줌마는 폴란드계 유태인으로 포로수용소에도 있었고, 모로코와 알제리에서 몸을 팔았다. 지금은 창녀들의 아이들을 키워주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너무 뚱뚱하고 건강이 안 좋아져서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 칠층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가장 힘들다.


주인공 이름은 모하메드이지만 모모라고 불린다. 이름을 보면 아랍계인 거 같고, 부모가 누군지 모른다. 로자 아줌마가 키우는 애들 중에 가장 오래되었으며 10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성숙하다. 생활비가 왔었는데 그마저도 끊긴 지 몇 개월이 넘었다.


유태인 아줌마가 아랍인 아이를 키우는 모순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다. 어쨌든 아줌마는 모모를 아랍인처럼 키운다.


프랑스에선 창녀들이 자신의 아이를 키울 수가 없다. 사회적 약자는 정말 아기를 키울 자격이 없는 건지 묻고 있는 것 같다.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 중에도 많다. 하지만 가난해서, 창녀라서, 장애인이라서, 동성애자라서 키우지 못하게 하는 게 맞을까? 아이를 못 키우게 하려면 그것과 무관하게 부모 자격시험을 보게 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만약 그런 시험이 있다면 나는 통과할 수 있을까?


로자 아줌마가 가장 무서워한 건 암이다. 모모는 의사 선생님이 다녀가시면 항상 암은 아니라고 안심시킨다. 아줌마 바람대로 암은 아니지만 다른 병으로 죽는다. 집착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사람을 눈멀게 한다. 이런 점에서 집착과 사랑이 잘 구별 안 가기도 하지만 사랑은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아줌마는 모모에 대한 의존도 때문인지 모모의 나이를 속이고 학교도 안 보낸다.


프랑스에서는 개인주의 때문에 종족이 없다고, 떼강도들이 일을 모의할 때만 있다고 비판한다. 개인주의가 점점 가족이나 공동체를 해체하게 만든 주범일까? 오히려 자본주의나 도시화 때문이 아닐까?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에 보면 진정한 개인주의자는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 남의 자유를 존중하며 협력한다고 말한다.


어느 날 모모의 아빠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아이를 돌려달라고 한다. 남자는 모모의 엄마를 죽이고 정신병원에 있어서 그동안 연락할 수 없었다고 한다. 로자 아줌마는 실수로 아랍의 모하메드가 아닌 유태인 모세로 키웠다고 거짓말을 하자 심장이 안 좋았던 남자는 충격을 받고 쓰러져 죽는다. 이건 좀 그렇다.


로자 아줌마는 엄마를 죽이고 정신병원에 들어간 아빠보다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모모에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욕심 때문에 모모의 나이도 속이고 학교도 안 보냈으면서. 모모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아빠보다 로자 아줌마에게 있는 것을 더 바란 것 같다. 낳아준 부모보다 키워준 부모가 부모다.


아줌마의 상태가 너무 나빠지고 집세도 못 내게 되자 의사 선생님이나 건물 관리인은 아줌마를 요양병원에 보내고 모모는 구제센터로 보내려고 한다. 모모는 아줌마가 병원에 가게 되면 식물인간 상태로 신기록을 세우며 비참하게 살거라 생각한다. 모모는 이스라엘에 있는 친척들이 아줌마를 데리러 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지하실로 사람들 몰래 숨는다.


시체 썩는 냄새를 향수를 뿌리며 감추고 숨어있던 모모는 삼주만에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우리는 아줌마를 요양 병원에 보내고, 모모도 구제센터로 보내는 것이 옳은 거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냥 머리로 얘기하는 거다. 가슴은 모모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참한 현실이 모모에게는 삶이고 사랑이다.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냐"라고 묻는 모모의 질문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사랑 없이 살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아줌마는 모모를 진정으로 사랑했을까? 아마도 자기 방식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잘 모르겠다. 로자 아줌마를 보며 사람이 가난하면 존엄하게 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나 병은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운이 좋아야 잘 죽을 수도 있다. 살아 있는 동안,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동안 존엄하게 사는 수 밖에 없다.


작가는 제목처럼 ‘자기 앞의 생’을 남이 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 같다. 자본주의가, 개인주의가, 복지제도가 인간의 많은 부분을 커버하지 못한다. 인간은 끼리끼리 서로 도움을 주며 의지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랑 없이 살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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