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청년 Jun 04. 2021

위기의 부부

인생의 베일 - 서머싯 몸

세속적인 여자 키티를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그 여자가 유부남인 찰스와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아버렸다.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보통은 이혼을 하겠지만 세균학자인 이 소설의 주인공 월터는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콜레라가 창궐한 지역에 함께 갈 것을 제안한다.


여자는 찰스가 당연히 아내를 버리고 자신에게 올 것을 기대했지만, 남자는 여자에게 남편을 따라갈 것을 강요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소설은 단순 치정극 같지만 이 소설이 다루는 주제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내가 어리석고 경박하고 천박하다고 해서 날 비난하는 건 공평하지 않아요. 난 그렇게 자랐어요. 내가 아는 모든 여자들은 다 그래요.” 이렇게 말했던 키티는 수녀원에서 고아들을 돌보고 병자들을 치료하는 수녀들과 함께 생활하며 점점 변한다.


고상하고 똑똑했던 남편 월터는 복수를 위해 병에 걸려 죽기를 바라고 전염병이 창궐한 지역에 아내를 데려왔지만 그런 자신을 오히려 경멸하게 된다. 남편 월터는 수녀들과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마치 성자처럼 떠받들여지고 있다.


고상했던 남편은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 나락으로 떨어지고, 저급했던 부인은 영혼을 치유해가며 성장해 가는 모습이 드라마틱하게 엇갈린다.


“난 뭔가를 찾고 있지만 그게 뭔지 잘 몰라요. 하지만 그것을 아는 건 분명히 내게 무척 중요해요. 그리고 내가 그걸 알아내면 모든 게 달라질 거예요.” 사람들은 무언가를 찾고 있지만 자기가 추구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찾으면 달라질 거라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 지역 행정 부관인 워딩턴의 입을 통해서 작가는 말한다. 그건 바로 “도(道). 우리들 중 누구는 아편에서 그 ‘길’을 찾기도 하고, 누구는 신에게서 찾고, 누구는 위스키에서, 누구는 사랑에서 그걸 찾죠. 모두 같은 길이면서도 아무 곳으로도 통하지 않아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도', 즉 어떤 길이지만 도라는 길은 존재 그 자체이지 어떤 목적이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서양 작가가 동양의 ‘도’ 개념을 이렇게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한갓 환영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추구하는 길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환영에 불과하다는 걸, 그냥 삶 자체를 보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은 거 같다.


월터가 추구했던 고상함도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자 한갓 환영에 불과했다. 키티가 추구했던 사랑도 남편에게 알려지자 또한 환영에 불과했다.


“그녀는 그가 용서해 주기를 바랐다. 더 이상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 그것만이 유일하게 그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리라.” 사실 월터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콜레라 연구'가 아니라 ‘용서'밖에 없다. 하지만 고상한 척했던 자신이 용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월터는 견딜 수 없었다. 저급한 여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 잠깐 머물렀다 가는 신세로도 모자라 자신을 고문하다니 인간은 얼마나 딱한 존재인가?” 단테의 신곡에서 이 소설의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했는데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날 그녀가 언뜻 엿본 숭고한 아름다움에 비하면 그들의 문제는 하찮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돌연 이토록 명백하게 다가왔는데, 그는 어째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고상했던 월터는 숭고함보다 그들의 문제가 더 중요했지만, 저급했던 여자는 수녀들의 숭고함과 아이들의 순수함 속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월터는 자기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아내를 통해 듣고, 콜레라에 걸려 죽으면서 한 마지막 말이 “죽은 건 개였어"다. 주석에 따르면 어떤 마을에 사는 남자가 미친개에게 물렸는데 사람들은 남자가 죽을 거라고 법석을 떨었지만 남자는 상처가 낫고 정작 개가 죽었다는 내용의 시를 빗대어 말한 거다.


아내 키티는 찰스를 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이 죽은 후 홍콩으로 돌아와 찰스를 다시 만나자 육체적 관계를 거부하지 못한다. 중요한 깨달음을 얻어도 현실은, 몸이 그걸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직 갈길이 멀다. 하지만 한가닥 희망을 남기는데 영국으로 돌아와 홀로 남은 아버지를 돌보기로 결심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저급한 여자인지 알면서도, 사랑해서 결혼한 여자가 불륜을 저질렀고 복수를 위해 사지로 데려왔지만 결국 여자는 오히려 영혼이 치유되고, 자신은 용서하지 못하고 영혼이 피폐하여 콜레라에 걸려 죽고 마는 엇갈린 운명의 비극이 되었다.


비극이라기보다는 자초한 것인지 모른다. 고상함을 추구했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던 지식인의 위선을 풍자한 것일 수도 있고, 저급했지만 점점 깨달아가는 키티의 모습 속에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도는 '길' 그 자체이지 어떤 목적지가 아니다. 어떤 목적을 추구하다 보면 헤매거나 벗어났을 때 걷잡을 수 없으며, 도달하더라도 또 다른 길이나 허망함을 깨닫게 될 확률이 높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는 가볍지 않고 묵직하다. 더구나 재밌다.

작가의 이전글 함께 읽는 즐거움, 삼삼 독서단 후기와 추천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